"국정은 10여 명의 대통령 측근들이 왈패처럼 중심을 잡고 이끌고 가는 거야."
5년 전 이맘 때 청와대의 한 실세 비서관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때만 해도 무슨 망발인가 싶었다. 100명이 넘는 장ㆍ차관급 공직자와 100여명의 여당 의원, 청와대와 정부의 각종 고문단과 위원회 인사 등 정책을 만들거나 지휘하는 사람들이 줄잡아 1,000명은 될텐데 달랑 대통령 측근 10여 명이 나라를 이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들이 국정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오만의 극치로 여겨졌다. 그러나 불과 얼마 뒤 그 말의 진의를 알게 됐다.
어떤 대통령도 정권 출범 초기에는 의욕이 넘친다. 머리 속엔 온통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새로 만들겠다는 생각뿐이다. 자신은 이전 대통령들과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가득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취임 초 청와대의 '얼리버드(early birdㆍ일찍 일어나는 새)'를 선언하며 의욕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대통령의 열정에 자극받아 보좌진도 관련 정책을 쏟아내는 등 청와대 전체가 숨가쁘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땠을까.
청와대가 사령부라면 정부 부처는 최일선 사단이다. 대통령이 머리고 부처 공무원들이 몸통인 셈이다. 따라서 현장 공무원들이 지휘부 뜻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느냐에 정권의 성패가 달려 있다. 하지만 공직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지극히 성실할 것이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견위치명(見危致命ㆍ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기의 몸을 나라에 바침)의 정신까지 기대하기는 무리다.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공무원들이 윗선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거나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폐쇄적이다 싶을 정도로 수동적인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문제란 것이다.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주요 정책을 결정해 지시를 내리면 이들은 대부분 소리 높여 "Yes sir"를 외친다. 그러나 돌아서면 부지하세월인 경우가 다반사다. 대통령이 노려보고 있는 한두 개 핵심 정책 정도에만 에너지를 집중할 뿐 다수의 정책 추진에서는 진척도가 매우 낮은 게 보통이다.
실제 이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내부에서도 이런 광경은 종종 목격됐다. 전후좌우를 재면서 서행 운전하는 공무원 출신 보좌진을 핵심 실세 비서관들이 닦달하며 채근하곤 했다. 청와대 내 이 전 대통령 측근 보좌진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 중 하나가 이런 부분이었다.
청와대에서 결정돼 내려간 업무 지시도 막상 일선 부처에 가면 "관행과 다르다" "법 조항에 없다" "원칙에 위배된다" "내 관할이 아니다"는 등의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지곤 했다. 그만큼 훗날 책임져야 할 부분이 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 정책일수록 기존 업무와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 업무 추진에 무리가 뒤따른다. 이 경우엔 더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순차적으로 계통을 밟아 일을 추진하려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개혁 정책을 꽃피우려면 때론 부수적인 규칙 변경을 서둘러야 하고, 때론 법망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속 페달을 밟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에는 정책 방향을 세운 뒤 공직 사회가 이를 제대로 집행하도록 독려하고 추진 여부를 단계별로 감시하고 체크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이 같은 역할이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할 청와대 핵심 실세 보좌진의 몫인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 그룹인 대학 교수와 외국 기관 책임자 출신, 해당 부처에서 잔뼈가 굵은 관료 출신들이 대부분인 현재의 청와대 보좌진이 이를 얼마만큼 적절히 수행해낼지 의문이다. 오히려 공직 사회의 노회한 상황 논리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명운을 같이할 인사들이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할 수 없다. 조금 힘은 들겠지만 박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대통령이 부처 국ㆍ과장급과도 전화통화를 하고 때로는 청와대로 불러들여 기합도 주는 식의 분위기 전환책이 필요하다. 100% 대한민국 창조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염영남 정치부 차장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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