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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100일

입력
2013.02.2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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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으로 보내는 73번째 편지를 녹음해 트위터로 전송한 후 이 글을 씁니다. 창을 열어 먼데 하늘을 바라봅니다. 깊고 조용한 밤하늘 어딘가에 목숨을 걸고 하늘로 오른 고단한 이웃들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듯해 가만히 마음 모아 안전을 기도합니다. 쌍용차 벗님들이 송전탑에 오른 지 어제로 100일을 맞았습니다. 올 겨울은 참으로 길고 길었습니다. 이제야 간신히 봄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만, 겨우내 얼었던 것들이 풀리는 해토머리 무렵에 사고가 많다는 것을 아는 터라 또 걱정이 앞섭니다. 봄비도 반가울 것 같지 않네요. 비가 오면 우웅우웅 고압선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는 곳, 15만 4,000 볼트 전류가 흐르는 철탑 위에서 사람이 100일을 견디다니요.

80일쯤 전에 저는 매일 밤 고공의 벗님들과 함께 책을 읽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매일 밤'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이 겨울을 하늘사람들과 함께 보낸 느낌입니다. 제가 고공농성이라는 극한의 투쟁 현장에 매일 밤 연결되게 된 것은 '소리연대'를 통해서입니다. 지상에서 내몰려 하늘로 올라가야 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댄 날이 있었습니다. 어떤 시인들은 깃발에 시를 썼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지요. 그때 제 친구 심보선 시인이 '소리연대'를 제안했는데 아주 멋진 계획이었어요. 고공 농성하는 분들이 외롭지 않게 휴대폰으로 소리를 보내드리자! 그렇게 시작한 책 읽기는 단발성으로 그치기보다 매일 밤 지속되면 조금이라도 더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발전해 오늘까지 왔네요.

저는 노동운동을 잘 모릅니다만, 국민의 대다수가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세상이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어 간다는 것, 그러므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귀하게 대접받고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평생 일해 온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려지거나, 쓰다가 언제든 대체해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개인의 인격이 모독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당해고자의 복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기업의 부당노동행위 근절, 노조탄압 중단, 이런 요구들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지켜지는 사회라면 합리적으로 조율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상식입니다. 선진국 대열 합류를 희망하는 국가라면 공들여 추구해야 하는 사회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23명의 죽음을 겪어야 한 쌍용차의 경우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먹튀자본', 회계조작에 의한 부당한 정리해고, 비정규직 불법파견, 민주노조 말살 등 온갖 부도덕한 문제들이 한데 얽혀있습니다. 우리 사회 기업윤리의 수준과 노사문제가 집약되어 드러나는 상징적인 곳이지요. 쌍용차문제가 공적이고 정의롭게 해결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어물쩍 넘어가버리면 다른 기업들의 불법적 정리해고가 더욱 판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켜보는 시민들은 답답합니다. 대선 전엔 금방이라도 해결할 것처럼 여야 모두 나서더니 대선이 끝나자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쌍용차가 정상화되려면 먼저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하는 게 수순이지요. 진실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는 정부와 정치권의 노력이 필요하고요. 이 과정이 진정한 사회통합이 모색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고향집에 갔을 때 소리연대 녹음을 한 적이 있습니다. 휴대폰에 대고 책을 읽는 저를 보고 여든이 넘은 제 어머니가 뭘 하는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금세 눈물이 그렁해지며 재촉하셨습니다. 어여 그이들 내려오라 하라고요. 생때같은 목숨들이 왜 하늘에 매달려 있냐고요. 이런 것이 어머니 마음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시점입니다. 고공농성 하시는 분들이 안전하게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랍니다. 지상의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모여 새봄엔 희망의 넝쿨로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통합의 시작은 가장 고통 받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온기를 채워가야 하는 일이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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