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시인
까치가 날지 못하게 된 이유는 덫에 치여 오른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까치는 기겁을 하고 날아오르기 위해 내달렸다. 오른다리를 못 쓰는 까치는 내달리면서 오른쪽으로 몸이 쏠렸다. 얼마 못 가 도랑에 쳐 박힌 까치는 벌떡 일어나 왼발로 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높이 뛰어오르면 충분히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중을 껑충껑충 뛰어오르듯이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까치는 어른들에게 잡히곤 했다. 성한 다리에 끈을 묶어 마당에 매놓았다. 모이와 물을 주면 까치가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어른들이 일을 나갔을 때 아이들은 까치 말목에 묶인 끈을 끊었다. 그리고 까치를 힘껏 날려 보냈다. 까치는 날아올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까치는 한쪽 다리로 설 수 없었다. 날개를 펼치고 수평을 잡고 있는 까치를 보았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으나 하늘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땅으로 내려온 까치는 스스로 날아오를 수 없었다. 부러진 오른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아이들은 부러진 까치발에 나뭇가지를 대고 실로 묶었다. 까치를 언덕 위로 데려가 날려주었다. 까치는 안간힘으로 날았다. 결국엔 바닥에 쳐 박히듯 내려앉았다. 까치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까치발에 댄 나뭇가지를 풀어주었다.
우리 동네에는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고양이와 강아지와 함께 먹었다. 잠을 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고양이에게 한 숟가락 강아지에게 한 숟가락 그리고 자신의 입에도 한 숟가락 사이 좋게 떠 넣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밥을 먹는 걸 보면 비위가 상한다고 보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줄 사랑을 동물에게 베푼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외출할 때에도 고양이와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할머니가 사는 기와집 뒤뜰에는 조와 수수가 떨어지지 않았다. 참새 박새 콩새 비둘기 까치가 날아와 모이를 쪼아 먹고 날아갔다. 절름발이 까치는 새들이 모이를 쪼아 먹고 간 사이에 뒤뜰에 나타나곤 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봤지만 차츰 낯이 익어 멈칫거리지 않았다. 까치는 기와집 근처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이를 쪼아 먹고 옹달샘 물을 마시고 있었다. 지저분하던 몸도 깨끗해졌다. 까치의 까만 눈에서 별빛이 반짝거렸다. 기름진 윤기가 털을 감싸고 있었다. 까치는 기와집 뒤뜰에 웅덩이를 파고 누워 있었다. 고양이와 강아지도 까치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까치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낮에도 뒤뜰 웅덩이에 앉아 눈꺼풀을 내리깔고 잠들었다.
서로를 잘 아는 사이에는 말보다 얼굴 표정이나 눈빛으로 더 많은 것을 주고받는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연결된 광케이블 같은 끈으로 주고받는다. 할머니와 같이 산 고양이와 강아지도 마찬가지였다. 기와집 뒤뜰에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고양이 강아지 무덤이 있었다. 할머니는 죽은 고양이와 강아지 제삿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촛불을 밝혀주고 고깃국에 만 밥을 무덤 앞에 갖다 놓았다. 할머니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었다. 할머니의 낡은 앨범에는 할머니와 같이 산 고양이와 강아지 사진이 꽂혀 있었다.
할머니와 절름발이 까치 사이는 점점 좁혀졌다. 까치는 할머니를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까치가 야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까치는 할머니가 나타나면 반갑다는 건지 날고 싶다는 건지 날개로 바닥을 쳤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까치에게 다가가 날개를 어루만져 주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까치의 눈에서 까마득한 우물 끝이 보였다.
할머니는 신발주머니를 목에 걸고 외출했다. 까치는 까만 눈을 빛내면서 할머니 품에 안겨 있었다. 서로에게 심장 뛰는 뭉클한 순간을 선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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