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시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해결사'로 낙점한 이승엽(삼성)의 기용을 두고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본선 풀리그에서 22타수 3안타로 극도의 부진을 보였던 이승엽에 대한 여론은 차가웠다. 하지만 이승엽은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일본의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역전 투런홈런으로 두들겼고, 쿠바와의 결승에서도 선제 솔로포를 터뜨리며 일약 '난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덕분에 김 감독의 '뚝심의 용병술'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그러나 내달 2일부터 개막하는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이승엽 드라마'는 보기 힘들 전망이다. 류중일 대표팀 감독이 이승엽을 경우에 따라 벤치에 앉혀 두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대호(오릭스)와 김태균(한화)까지 3명의 1루수가 승선한 것이 고민의 발단이다. 결국 두 명은 1루수와 지명타자로 출전하고, 나머지 1명은 벤치에서 교체 투입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당장 27일과 28일 열리는 공식 연습경기부터 선발 오더에는 2명만 넣어야 한다. 류 감독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플래툰 시스템이고, 그 1순위 희생양이 이승엽이라는 것이 조금 놀랍기도 하다. 류 감독은 "왼손 선발이 나올 경우엔 이승엽을 빼고 오른손이 선발일 땐 이승엽을 쓰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민타자'로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어 온 이승엽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승엽은 마지막 태극 마크를 달고 백의종군을 다짐하고 있다.
그는 각종 인터뷰에서 "나는 대타, 조커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도우미'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후배인 이대호와 김태균이 성장한 데 대한 믿음도 크다. 그는 "이제는 내가 없어도 큰 관계가 없다.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이승엽은 일본 진출 초창기인 지바 롯데 시절 보비 발렌타인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에 극심한 마음 고생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에서는 기분 좋은 '반쪽' 선수로 후배들과 미국 입성을 다짐하고 있다.
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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