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1시 5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열린 청운효자동 주민들의 환영 행사에서 "감회가 새롭다, 감회가 깊다"고 거듭 말했다. 이어 1시 13분, 박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에 들어섰다. 그는 붉은 색의 화려한 한복을 차려 입었지만, 얼굴엔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모두 흉탄에 잃고 청와대에서 쫓기듯 나왔던 1979년 11월 21일의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대통령 경제특보였던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 등 당시 청와대 앞에서 박 대통령을 배웅한 사람들은 안타까운 눈으로 27세의 가장이 된 그를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33년 3개월의 세월은 박 대통령의 운명을 다시 한 번 180도 바꾸었다. 그는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이자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돼 청와대의 새 주인이 됐다.
박 대통령은 중학교 2학년 때 청와대로 들어가 15년을 살았다. 1974년 육 여사에 이어 79년 10ㆍ26으로 박 전 대통령마저 서거할 때까지였다. 그는 9일 간의 국상(國喪) 치르고 나서 동생인 근령, 지만씨를 데리고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이사했다.
이후 18년은 박 대통령에게 은둔과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는 고전과 불교 경전을 읽고 일기를 쓰거나 여행을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정수장학회ㆍ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재단 이사 등을 지내며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을 펼치면서도 공인(公人)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은 거부했다.
박 대통령은 97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원 유세를 다니는 것으로 은둔을 끝냈다. 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정치 인생 15년엔 유독 굴곡이 많았다. 그는 2002년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면서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가 1년이 못 돼 복당했다. 2004년엔 차떼기 파문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존폐 위기에 몰렸던 한나라당의 대표를 맡았고, 17대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인 121석을 확보하는 반전을 만들어냈다. 그가 명실상부한 대선 주자로 부상한 것은 이 때였다. 그는 이후 2년 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재보선 등 거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유세 도중 얼굴에 커터칼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이명박 전 대통령에 패했다. 이후 4년 가까이 철저한 비주류 행보를 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한나라당이 흔들리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다시 전면에 나섰고, 당명ㆍ정강정책 개정을 비롯한 과감한 개혁을 통해 지난 해 18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대선을 앞두고 과거사 인식 논란과 안풍(安風ㆍ안철수 바람) 등으로 인해 '박근혜 대세론'이 무너지면서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국민통합과 준비된 여성대통령론을 내세워 3.6%포인트 차이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제치고 승리했다. 33년 전 청와대를 떠났던 박 대통령은 이날 취임사를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청와대에 들어갔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