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집의 방 한 칸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작다. 방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드나드는 문도 작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키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것일까? 그렇다. 서울대 의대 연구팀이 15세기부터 19세기 사이 조선시대 유골 110여구에서 나온 넓적다리의 뼈를 토대로 평균 키를 산정한 결과, 당시의 남자들의 평균 키는 161㎝, 여자는 149㎝였다. 그러면 단지, 키가 작아서 방이 작았고, 문이 작았던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집의 작은 규모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칸이 보통 작으면 가로 세로 1.8m에서 크면 2.4m 정도가 되니 160㎝의 남성이 누워도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좁은 방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저절로 드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조선집의 크기를 나타내는 '칸'은 부재를 잇지 않고 통으로 써서 이루어지는 공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조선집의 '방 한 칸'은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면적일 수는 있겠지만, 사람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면적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통으로 쓸 수 있는 부재의 길이에 따라 만들어지는 면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재는 어디서 오는가? 당연히 뒷산 소나무 숲에서 온다. 뒷산 소나무 숲의 성장이 실하면 좀 더 넓은 칸이 생기는 것이고, 빈약하면 좀 작은 칸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궁궐을 짓는다든가, 명문세가의 집을 지을 때는 남한강과 북한강을 잇는 뱃길로 좀 더 먼 곳의 우람한 소나무들이 공급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집의 '한 칸'의 규모는 다 다르다. 조선집을 흔히 '휴먼 스케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철저한 오류다. 조선집은 인간적인 척도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뒷산의 척도'다. 그 '뒷산의 척도'에서 조선사람들은 '인간의 척도'를 발견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당연한 생각이 만들어낸 집이 조선의 집이다.
그렇다면 이 작은 방에서 조선 사람들의 생활은 어떤 식으로 꾸며졌을까?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해법이 없어 보인다. 침대도 들어가야 하고(둘이 자는 침대 하나 들여 놓으면 조선집의 방은 꽉 차고 말 것이다), 옷장도 있어야 하고, 화장대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행히 조선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성리학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성리학은 학문적으로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과 원리를 밝히려는 당대의 동아시아를 관류하는 철학사상이었다. 이 철학은 삶의 태도에서는 검소하고 검박함을 지향했다. 검(儉)은 모자람을 의미한다. 남는 것 보다는 모자란 것에 더 가치를 두는 태도이다. 그래서 검소는 꾸밈에 있어 화려한 것보다는 수수한 것을, 검박은 꾸미는 것보다는 그 바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조선의 음악이나 그림, 도자기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집도 예외는 아니다. 이 '검의 미학'은 그래서 단순함을 지향한다. 그래서 학자의 집에는 반닫이 하나 들여 놓기도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한 마디로 가구가 없는 방이야말로 올바른 사대부의 생활로 칭송되었다. 있으면 책상 하나, 더 있으면 방 모서리에 세워두는 책꽂이 하나 둘 정도가 다였다. 나머지는 벽장에 넣어서 보이지 않게 두었다. 책상 하나만 있는 방. 그리고 화려한 가구 대신 방의 삼면에 창을 내어 꽃이 피고 지는 계절과, 계절의 소리를 들여 놓았다. '청풍 한 칸'이라는 말이 실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방은 한없이 넓다.
철학이 그대로 생활에 스민 조선의 집이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방의 넓이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뒷산 소나무의 성장에 의해 방의 넓이가 정해진 집이 조선의 집이다. 그래서 방의 기본적인 모듈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의 집은 모듈을 조합해 전체를 구성한다. 한 칸이 두 칸으로, 두 칸이 세 칸으로 늘어나면서 안채를 구성하고, 기능이 달라질 때는 모듈을 독립시켜 사랑채를 구성한다. 그것이 채나눔이다. 그래서 채에서 채를 넘어 갈 때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옷차림을 바로 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채에서는 편하게 있어도 상관없지만 기능이 다르고, 위계가 다른 채로 갈 때는 처음부터 다시 나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검의 뜻이다. 흐트러짐을 살피는 것이다. 조선의 집은 꾸미지 않고(검박), 꾸미되 화려하지 않고(검소), 흐트러짐을 경계하는 최소주의의 삶을 담고 있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넘치고, 넘치는 것을 담기 위해 자꾸 커져야 하는 지금의 우리의 삶을 '모자람의 미학'으로 다잡을 수는 없을까?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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