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됐던 미국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대통령 집무실) 시즌2에는 민주당 대통령의 고문 변호사를 맡은 골수 공화당 여성이 나온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이면 에인슬리 헤이스(에밀리 플록터 분) 변호사의 미모와 명석함이 기억날 것이다.
헤이스는 누구도 저항하기 힘든 매력의 소유자였지만, 그런 그도 골수 민주당 출신의 다른 백악관 스태프과 사사건건 격한 말다툼을 해야 했다. 그 장면은 개인적으로 충격이었다. 민주주의 본산이라는 미국도 정파적 갈등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드라마에 따르면 양당 지지자들은 대대로 이어지며, 반대당 가문과는 결혼은커녕 가벼운 식사모임조차 꺼렸다.
이런 편가르기와 반목은 인간사회의 보편적 현상이자, 유전적 영향 때문일지 모른다. 실제 유전학이 발전하면서 한 인간의 정치적 성향이 유전자에 의해 크게 영향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회과학자이자 유전학자인 제임스 H 파울러 미국 UC샌디에고 교수는 2010년 2,000명의 청소년 유전자 정보와 그들의 정치성향을 조사했다. 그 결과 'DRD4' 유전자의 변이체인 '7R' 유전자 보유자들이 주변 사람들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결국 진보주의를 선택한다고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정치성향에 있어 유전자, 가족, 사회환경이 각각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세밀한 연구도 있다. 피터 해터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와 로즈 맥더멋 브라운대 교수는 지난해 8월 발표한 논문 '정치의 유전학 : 발견, 도전 그리고 진보'에서 일란성ㆍ이란성 쌍둥이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1974년부터 2012년까지 발표된 연구 89편을 재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한 사람의 정치지식, 선거참여도를 결정하는데 있어 유전자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다. 정당 성향은 가족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인종ㆍ성에 대한 자세는 유전자와 사회가 비슷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나마 사회의 영향력이 강한 분야는 대외정책 정도였다. 정치적 관심, 정당 선호도는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라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결론이다.
막 출범한 박근혜 1기 정부의 장관 후보자들 면면은 '정치의 유전학'을 떠올리게 한다.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선배인 고 서종철 전 국방부 장관의 아들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선친인 류형국 박사는 5ㆍ16 직후 군사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이었다. 인수위원들 중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이들의 아들이 4명이나 포진했었다. 여기에다 경제부총리를 비롯 많은 국무위원들과 청와대 수석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다.
'2세 대통령과 2세 장관들의 정부'라는 평가가 과장만은 아닌 셈이다. 정치성향에서 유전자와 가족의 영향이 강력하다는 연구결과들을 감안하면, 2대에 걸친 정치인연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멤버들이 얼마나 동질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인류의 진화 과정 속에서 어떤 이유로 정치적 성향이 유전자에 각인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의 정치성향이 여러 갈래로 진화했는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유전자의 다양성이 유지돼야만 어떤 위기와 재난에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간 조직도 마찬가지다. 구성원의 다양성이 유지돼야 외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더욱이 향후 5년 간 북핵을 비롯, 더욱 치열해질 미중 갈등, 일본의 엔화절하로 촉발된 전세계 화폐전쟁 등의 격랑을 헤쳐나가야만 할 정부라면 다양성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웨스트 윙' 드라마 속 대통령처럼 골수 야당 인사를 백악관 요직에 영입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치더라도, 막 출범한 박근혜 정부에 대해 기대감에 앞서 과도한 동질성에 대한 우려를 떨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영오 경제부차장 young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