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를 읽고 서울 숭문고의 국어 담당 허병두 교사가 한 온라인 글방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마크 트웨인 이후 최고의 유머작가로 꼽히는 미국 작가 제임스 터버(James Thurberㆍ1894~1961)의 라는 작품에 관한 것이다.
어느 외딴 섬에 해적들이 들이닥쳐 보물을 찾다가 실패하자 알파벳 O 자를 쓰지 못하게 한다. 당연히 대소동이 벌어진다. 주민들은 바이올린(violin) 첼로(cello) 오보에(oboe) 피아노(piano) 등 음악을 즐길 수 없게 된다. 오케스트라(orchestra)는 교향곡(symphony) 광시곡(rhapsody) 소나타(sonata) 협주곡(concerto)을 연주할 수 없고, 오라토리오(oratorio) 성가대(choir) 합창단(chorus)은 해체된다. 테너(tenor) 바리톤(bariton/baritone) 소프라노(soprano) 알토(alto) 콘트랄토(contralto)도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다.
철학(philosophy) 지리학(geography) 전기문학(biography) 생물학(giology/biology) 심리학(psychology) 등 연구서적이나 과학 서적들도 없어진다. 대학(college)과 책(book)도 사라지고 교수들(professors) 학자들(scholars)은 설 땅이 없게 된다. 심지어 영웅(hero)은 그녀의(her)라는 말로 바뀌고 시인(poet)은 애완동물(pet)이 되고 만다.
그런데 묘하게도 법률과 연관된 낱말에는 O 자가 들어간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변호사 하이드는 해적들 편에 붙어 잇속을 챙기기 시작한다. 주부들이 옥수수(corn) 감자(potato) 토마토(tomato)도 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자 그는 사과(apple) 바나나(banana) 파인애플(pineapple)을 먹으면 된다고 한다. 커피(coffee) 대신 차(tea)를 마시면 된다는 식이다.
섬사람들은 마침내 해적들에 맞서 싸운다. O 자가 들어가는 낱말 가운데 4개는 결코 빼앗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적들을 쫓아낸 주민들은 후세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잊지 않도록 O 자가 들어간 거대한 조형물을 바닷가에 세운다. 그 네 가지는 희망(hope) 사랑(love) 용기(valor), 그리고 자유(freedom)다.
제임스 터버는 어려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고 40대에 완전히 실명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단편소설 동화 만화를 많이 발표했다. 특히 언어를 깊이 연구해 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뒤를 돌아볼 때는 화를 내지 말고, 앞을 바라볼 때는 두려워하지 말라. 대신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라.”(Do not look back in anger, or forward in fear, but around in awareness)는 말도 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이라는 동요(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가 있다. 선생님은 '고'자를 빼고 노래를 불러보게 했었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아버지는 나귀 타 장에 가시 할머니는 건너마을 아저씨 댁에 추 먹 맴맴 달래 먹 맴맴”대체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기 위해서였을까?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글자의 중요성을 알려주려는 것이었을까? 그 노래에 유독 '고'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규칙을 어기고 '고'를 발음한 아이들은 벌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발음을 제한할 경우 이라는 동요는 처음부터 부르기가 어려워진다. “드름 드름 수정 드름 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또 이런 노래도 불러야 한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 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가요...”과연 이런 노래에 희망이 있을까?
제임스 터버의 작품은 알파벳, 그 중에서도 사용빈도가 아주 높은 모음 O의 중요성을 잘 알게 해준다. 그러나 그 글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글이든 영어든 모든 철자와 받침, 자음과 모음이 다 중요하며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다. 마치 사람들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지만 이 세상에서 하고 있는 일은 저마다 다 중요하며 그 일은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것처럼.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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