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80년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상공부를 트로이카라 불렀다. 경제기획원이 경제개발의 큰 밑그림을 그리면, 재무부와 상공부는 그에 맞춰 각각 금융과 실물을 움직였다. 한국형 산업화, 곧 정부주도형 고도성장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세 톱니바퀴가 일사불란하게 맞물려 돌아간 결과였다.
나웅배씨는 80년대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장관을 모두 역임했던 유일한 인물인데, 세 부처를 비교했던 그의 촌평은 지금도 관가에 회자된다. "재무부는 파워풀(powerfulㆍ강력)하고 상공부는 컬러풀(colorfulㆍ화려)하고 경제기획원은 아너러블(honourableㆍ명예)하다."
금융을 지배하면 기업도 함께 장악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재무부의 힘은 막강했다. 신발과 장난감부터 자동차 선박까지 모든 산업이 정부지원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상공부의 화려함도 대단했다.
이에 비해 경제기획원은 좀 달랐다. 무엇보다 국가경제의 장래를 고민하고, 미래의 청사진과 전략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비롯해 전두환 정부의 경제안정화 시책,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까지 역대 정부의 모든 '큰 그림'들은 예외 없이 경제기획원 관료들의 머리와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재무부나 상공부에 대해 일종의 우월의식까지 갖고 있었는데, 단지 다른 장관급 부처보다 한 단계 높은 부총리급이어서 만은 아니었다. 재무ㆍ상공부가 '관치의 달콤함'을 누릴 때 경제기획원은 큰 담론을 말하고 먼 미래를 구상한다는 도덕적 우월감 같은 것이었다.
경제기획원 안에서도 가장 명예로운 곳은 기획국(현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이었다. 일종의 싱크탱크 같은 곳이다. 매년 발표되는 경제전망과 경제운용계획은 물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래 중장기 프로젝트들은 모두 기획국 작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획국 출신이 중용되고 고위직에 발탁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유명한 고 김재익씨부터 김인호 강봉균 한이헌 이기호 최종찬 권오규씨까지. 아마도 기획국은 정부 내 단일부서로는 가장 많은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장관을 배출한 곳일 게다.
기획국의 이 화려한 역사에 2명이 새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박근혜 정부의 초대 경제팀을 이끌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와 조원동 경제수석 내정자다. 두 사람 모두 경제기획원 출신의 기획통들이다. 새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정권 초 경제팀에 기획전문가들이 발탁된 건 이상할 게 없고, 워낙 이런 업무에 익숙한 전문가들이라 잘 할 것으로 믿는다.
다만 기획가들에겐 종종 치명적 한계가 발견되곤 하는데, 그건 숲은 잘 보지만 나무는 놓치곤 한다는 점이다. 큰 설계만 하다 보니 섬세한 터치가 부족하고, 디자인만 하다 보니 색채감이 떨어지며, 건물만 짓다 보니 배관 배선 인테리어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경제기획원이 이끌었던 시절 한국경제에 시장은 없었다. 오직 정부만 있었고, 정부가 그리는 그림대로 경제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의 시대이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다.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나무의 생리를 아는 게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거시는 강하지만 미시는 취약해 보인다는 것이 바로 '현-조'팀에 대한 우려의 포인트다.
한국경제의 경이적 성장은 경제기획원이 만든 열매다. 동시에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 또한 경제기획원이 남긴 유산이다. 고속 산업화와 불균형 성장, 경제력집중, 개방과 신자유주의가 낳은 후유증들 말이다. 경제기획원 기획국의 마지막 세대 격인 현오석 후보자와 조원동 내정자에게 이 숙제가 주어진 것도 어쩌면 운명이란 생각이 든다. 결자해지(結者解之)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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