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1908~43)의 짧고 비극적인 생애가 1960년대부터 구소련 독일 미국 등에서 잠자고 있던 문건들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 점차 선명해지고 있다. 전사설 처형설 자살설 등이 분분했던 그의 죽음은 2차대전 중 소련군 포병장교로 독일군 침공에 맞서다가 포로가 된 뒤 정신이상 상태로 수용소를 탈출하다 총살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가 참전 한 달 만에 포로가 된 경위는 전투 중 생포설과 자발적 투항설이 엇갈리며 의문으로 남아있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최근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 389쪽 분량의 스탈린 파일을 열람했다. 주가슈빌리가 용감한 군인이긴 했지만 투항했다는 것이 슈피겔의 조심스러운 결론이다.
두 명의 부인에게서 1남2녀를 얻은 스탈린이 첫 부인 소생인 장남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생후 8개월 때 모친을 잃고 아버지의 냉대 속에 10대 시절부터 여러 여자와 차례로 동거했던 그는 1937년 포병학교에 자원 입대한다. 그의 이복동생 스베틀라나는 생전에 "비폭력적이고 조용하고 다소 서툴렀던 그가 왜 장교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슈피겔이 보기에 그의 입대는 자신을 버린 자식 취급하는 아버지에게서 달아나려는 방편이었다.
1941년 5월6일 포병학교를 졸업한 주가슈빌리는 사흘 뒤 제14탱크사단의 제14곡사포연대 중대장으로 임관했다. 문건에 따르면 그는 최고지도자의 아들을 우대해 참모직에 배정하려는 군의 제안을 거절했다. 6월22일 나치가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임관 한 달 반 만에 포대를 이끌고 당대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독일군과 대적했다. 교전 3주 만에 소련군 130만명이 죽거나 생포되는 불리한 전황에도 그는 사단장 메달 수상자로 상신될 만큼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7월14일 소련군 후퇴를 엄호하다가 독일 폭격기 30대의 공습을 받았다. 부대원 전원과 더불어 실종된 그는 독일 항공부 문서보관소에 있던 7월18일자 포로 심문조서에 다시 등장한다.
서류로 행적이 파악되지 않는 나흘 동안 주가슈빌리가 투항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두 가지다. 먼저 소련군 수색대의 7월21일 보고에 그와 함께 피신했던 군인이 "주가슈빌리 동지가 호숫가에 도착하자 자기는 쉬겠다며 내게 계속 가라고 했다"고 증언한 내용이 있다. 다른 정황은 포로가 된 그의 육성이 담긴 심문조서에 있다. 그는 조국의 정치제제를 옹호했지만 아버지가 통솔하는 소련군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패인을 묻는 질문에 그는 "독일 폭격기"와 함께 "군대를 사지로 보낸 지휘부의 어리석은 행동"을 꼽았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아들의 노력이 결국 아버지의 나라를 탈주하는 것으로 마감된 셈이다. 투항 사실을 안 스탈린은 아들을 구명하려는 노력을 일절 하지 않았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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