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퇴임하는 김황식 총리
총리는 빛이 나기 힘든 자리다. 대통령 뒤에서 보좌에 힘쓰면 “존재감이 없다”는 비아냥을 듣고, 내 일 좀 해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간 “너무 튄다”는 타박이 쏟아진다. 공(功)을 인정받긴 어렵고 제 것이 아닌 과(過)의 책임도 무겁게 나눠져야 한다. 더구나 하는 일마다 격렬한 반대와 혹평을 부르는 대통령 곁이라면 도매금으로 욕 먹기 십상이다.
그런 여건을 감안하면 김황식(65) 총리는 후한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한편에서 칭송하듯 “명(名)총리가 났다”는 말은 과할지 몰라도, ‘또 한 명의 대독(代讀)총리’에 그칠 것이란 당초의 우려를 씻고 민생과 소통을 키워드 삼아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그는 광주법원장 시절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글 ‘지산통신’에서 자신은 소외계층을 보듬고자 하는 ‘중도저(低)파’라고 썼다. “기득권에 연연한 우파 특히 극우는 추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꾸는 좌파 특히 극좌도 철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소신은 이념 대립에 휩쓸리지 않고 서민들 삶의 현장을 부지런히 찾아 불편을 헤아리는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민생 행보로 이어졌다. 매주 한 차례 업무 수행 과정의 소소한 에피소드와 단상을 자필로 써서 올린 ‘연필로 쓰는 페이스북’은 23만명의 친구를 불러모으면서 그를 따뜻한 총리로 기억하게 했다.
민주화 이후 최장수 총리(2년 5개월)로 명예롭게 물러나게 된 그를 20일 정부 광화문청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듣던 대로 그는 겸손했고 애써 말을 꾸밀 줄도 몰랐다. 그러나 4대강 사업 논란 등을 따질 땐 단호한 어조였고 간간이 언성도 높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마지막 주례연설에서 “저는 대한민국의 가장 행복한 일꾼이었다”고 했는데, 총리께서도 행복했습니까?
국가를 위해 귀한 자리에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우리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워낙 심하다 보니 어떤 정책을 펴거나 총리로서 의견을 내놓을 때 뜻이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고 오해를 사는 일이 적지 않았죠. 그런 분위기 탓에 늘 긴장을 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점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도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뭡니까?
운이 좋았죠. 사실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에서 총리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총리를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렸는데, 대통령께서 제가 주도적으로 나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줬어요. 사심없이 일하는 모습을 국민들도 좋게 봐주셨고. 초반에 대독총리니 의전총리니 할 때 제가 실속 있는 총리가 되겠다고 했잖아요. 제 경력으로 외화(外華)는 하고 싶어도 못하니까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만이 존재감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러날 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게 일했던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죠.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B 마이너스나 C 플러스 정도.
-요즘 대학에서 그 점수 받아선 취직하기 어려운데요.
그래요? 우리 학교 다닐 때 하던 수우미양가로 따지면 우 정도. 아, 잘 한 거죠.(웃음)
-지난해 6월 한일정보교류협정 논란 당시 사임할까 고민하셨다면서요.
협정 처리 과정에 국민이나 언론이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서명 두 시간 전에 부랴부랴 보류한 것은 온당치 못했습니다. 더구나 제게는 상의 한 말씀 없었어요. 굉장히 불쾌하고 섭섭했죠. 항의의 뜻도 있고 협정이 국익을 위해 꼭 필요했다는 제 뜻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나면 내 분풀이는 될지 몰라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논란만 키우고 국정에 큰 부담을 줄 수 있어 참았죠. 임기가 한참 남았다면 정말 절실했구나 싶겠지만, 몇 달 남겨놓고 던지면 큰 호응을 받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었고.
-전남 출신 첫 총리로서 지역사회의 기대가 부담이 되진 않았나요?
지역색에 의존하지 않고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진정한 지역화합을 위하는 길이고, ‘전남 총리 시켰더니 잘 하더라’는 평을 듣는 게 고향에 더 도움되는 일이죠. 뭐 해주는 것도 없다고 서운해 한 분들도 있었겠죠. 하지만 모교인 광주일고에 가서도 제가 나쁜 평가를 받는다면 다 후배들, 고향 분들에게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정홍원 총리 후보자와는 사법시험 14회 동기인데, 전임자로서 조언을 한다면?
판사와 검사로 서로 다른 길을 갔지만 초임 시절엔 테니스도 같이 치고 집에 초대 받아서 가기도 했어요. 주제넘은 말씀을 감히 드리면, 법조인은 법조계의 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쉬운데 그 틀을 벗고 세상을 넓게 조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말을 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겸손하게 듣는 노력이 필요하죠. 또 대통령 관계든, 정부 내 관계, 국회 관계든 인화가 중요합니다. 성품이 참 따뜻한 분이어서 잘 하실 겁니다.
-사법부 최고위직인 대법관 출신이 행정부의 2인자가 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삼권분립의 정신을 해칠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정도 결국 법 집행이니까 법조인이라면 자질을 갖췄다고 보지만 행정 경험이 부족한 게 문제죠. 저는 감사원장을 거쳤기 때문에 원한 건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런 점에서 대법관에서 바로 총리가 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삼권분립 침해를 이유로 드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법원장이나 헌법재판소장 출신도 괜찮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그렇지 않죠. 국가의 서열도 중요한데, 대법원장이나 헌재소장은 총리보다 서열이 높잖습니까. 김용준 인수위원장의 경우는 헌재소장을 하신 지 10여년 지났기 때문에 달리 볼 여지가 있겠지만, 얼마 전에 거친 분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세 분 중 두 분이 병역 면제자입니다. 고위 공직자와 그 자제들 가운데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가 유난히 많아 국민들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런 국민 정서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병역은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신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죠. 저는 부동시(不同視)로 군 복무를 하지 못했고, 그래서 총리직을 제안받았을 때 여러 번 사양했습니다. 제 아들은 최전방에서 현역 복무했습니다.
-총리 인사청문회 당시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감사원장 청문회 때 “총리는 안 한다”고 한 게 결과적으로 빈말이 된 걸 보면 정치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세상 일은 자신을 못해요. 법률에도 사정변경의 원칙이란 게 있잖아요. 하지만 정말 정치에는 뜻이 없어요. 이제 지하철 공짜로 타는 나이가 됐는데(웃음), 41년을 이어 온 공직생활은 여기서 마감해야죠.
-노인들 지하철 공짜 탑승을 문제로 지적해 논란이 일기도 했죠?
없애자고 한 게 아니에요. 줬던 걸 어떻게 도로 뺏습니까? 그건 어려워요. 복지 설계를 애초부터 잘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겁니다. 재정 부담을 줄여서 정말 필요한 분들에게 써야지, 여유있는 사람한테까지 혜택을 주면서 정작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존경합니까?
언론이나 사회적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능력이나 성품에서 장점이 많은 분입니다. 일의 방향을 잡고 추진하는 데 있어 상당한 혜안도 갖고 있어요. 이쪽에선 소통도 잘 합니다. 다만 반대되는 입장에 선 분들과는 소통이 부족했던 게 아쉽죠. 더 많이 접촉하고 이야기했으면 전폭적인 동의는 못 얻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격하게 성토하는 야당 의원을 상대로 작정한 듯 한판 하셨는데요.
그게 왜 한판이에요? 저는 늘 잘못된 지적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관계나 제 의견을 밝혀드렸지, 그냥 뭐가 뭐해서 피한다, 이런 자세를 취하진 않았어요. 어느 정부나 그렇지만 이 정부가 한 일에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공과를 평가해 달라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빛은 뭐였고, 그림자는 어떤 부분인가요?
너무 잘 아시겠지만 두 차례 금융위기, 유럽발 재정위기 상황을 잘 극복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신용등급도 향상됐고 2년 연속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어요. G20 개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한류 확산 등을 통해 국격도 많이 올라갔죠. 다만 성장의 효과가 서민들이나 중산층으로 잘 퍼지지 못했고, 사회적 갈등이 증폭된 점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죠. 동반성장, 상생, 서민금융, 민생 안정, 복지 확대 이런 쪽으로 노력은 많이 했지만, 나라 살림이란 게 짧은 시간에 성과가 나오진 않거든요. 방향은 잘 잡았고 기초는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정부가 잘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가운데 평가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4대강 사업이다. 탄생부터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거센 반대에 부딪쳐 좌초한 대운하 계획의 꼼수라는 의심을 받았고, 홍수ㆍ가뭄 대비와 수질 개선 효과, 환경파괴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감사원이 보 내구성과 수문 안전성, 예산 낭비 등을 지적하는 감사 결과를 발표하자 총리실과 관계 부처가 반박에 나서 정부 기관 간 다툼으로 번질 기미까지 보였다. 일각에선 김 총리가 감사원장으로 재직할 때 실시한 1차 감사 결과에선 안전성 등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 것을 두고 “김 총리가 부실덩어리 4대강에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한다. 김 총리는 “잘못 알려진 게 너무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기관에서 나온 감사 결과가 확연히 다른 이유가 뭘까요?
팩트부터 분명히 합시다. 제가 감사원장 때 1차 감사를 시작하긴 했지만 결과는 총리로 옮긴 뒤 나왔어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제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또 1차 감사는 계획과 설계, 2차는 공사 시행 결과를 평가한 것으로 포인트가 달라요. 이번 감사 결과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홍수 대비 기준이 200년 빈도냐 100년 빈도냐 등 일부 견해차가 있는 정도예요. 4대강 반대하는 분들의 주장처럼 ‘총체적 부실’을 지적한 게 아니에요. 다만 보도자료에 자극적인 표현을 넣어 오해할 소지를 제공한 건 신중하지 못했죠.
-총리실이 나서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검증’을 하겠다고 했는데, 감사원 입장에서는 감사의 신뢰성을 의심받는 상황이니 당연히 불쾌하지 않을까요?
감사 결과 재검증이 아닙니다. 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여기는 국민들의 불안과 태국 물관리 사업 수주에 끼칠 악영향을 잠재우기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한 거죠. 양건 감사원장이 국회 답변에서 “심각한 사태”라고 한 것도 총리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라며 나중에 정정했어요. 다툼 같은 건 없습니다. 사업 주체인 현 정부가 검증을 한다니 못 믿겠다는 말도 나오는데 참 답답해요. 내일모레 물러나는 정부에서 뭘 더 하겠습니까? 당장은 기본 입장만 정한 것이고, 민간학회가 중심이 된 사업 전반에 대한 검증 작업은 새 정부에서 착수합니다. 팩트를 좀 정확하게 봐주세요.
-요즘 인사청문회나 대통령 측근 살리기 특사를 보며 많은 국민들이 분노합니다. 이 정부가 말하는 법치란 지도층의 불법ㆍ탈법에는 관대하고 서민들의 생존권적 요구에는 가혹한 ‘거꾸로 선 법치’라는 비판도 나오는데요.
선진사회로 가려면 법 질서 확립과 엄정한 집행이 필요한데, 국민들 의식은 아직 높지 않아요. 고위직이나 가진 자, 서민들 다 마찬가지예요. 법률이 통치수단으로 악용된 일제시대나 독재시대의 영향도 있고, 짧은 시간에 산업화, 민주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편법과 반칙이 횡행한 결과이기도 하죠.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기 권리 찾겠다고 사회나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행위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작년 10월 법률가대회에서 용산참사와 관련해 “악한 약자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죠. 자칭 ‘중도저파’의 발언으로는 과하지 않나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악한’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약자라고 했을 겁니다. 사회적 약자라고 모든 행위가 익스큐즈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아무리 억울해도 시너를 쌓아두고 골프공 몇 천 개를 새총으로 쏴대고, 그건 아니죠. 재개발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아야겠지만 불법 행위에 대해선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페이스북 글에서 사회악 중 하나로 ‘공정성 없는 언론’을 언급했는데.
정치에서 말하는 진영 논리가 분파적으로 언론에도 작용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사설 같은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사실관계를 다룬 기사조차 회사 입장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저는 어떤 부문이든 극단은 싫어합니다.
-어머니를 ‘큰 스승’이라고 표현했는데, 가장 깊이 새긴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어릴 적 거지가 들어오길래 ‘거지 왔어요’ 했더니 ‘다음부터는 손님 오셨다고 하라’셨죠. 어떤 책이나 강의에서 그보다 더 강렬한 인간존중의 교육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우리 아이들한테도 이웃에 잘해라, 네 욕심을 앞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퇴임을 앞두고 가장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한 분을 꼽는다면?
제 아내죠. 같이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불만이 있었을 텐데도 항상 제가 가는 길을 존중하고 지원해 줬으니까. 바가지야 왜 안 긁겠어요? 몸 아프면 짜증도 내고 소소한 불평도 하지만, 큰 틀에서 제 생각이라든가 결정을 타박하고 반대한 일은 없죠.
-퇴임 이후 계획은 세워두었습니까?
특별한 건 없어요. 긴장의 끈을 풀고 여유 있게 책도 읽고 좋은 분들하고 부담 없이 대화도 하고 싶습니다. 마냥 놀 수만은 없으니 행복한 사회, 행복한 삶에 대해 공부를 좀 할까 해요. 기회가 닿으면 외국에 가서 다른 입장도 접해 보고 싶고.
김 총리는 페이스북에 고향인 전남 장성에 있는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白碑)를 소개한 적이 있다. 명종이 구구한 설명이 오히려 누가 되는 그의 청렴함을 크게 기려 아무 것도 새기지 않은 묘비를 세우라고 명했다는 얘기다. 자신의 묘비에는 어떤 글귀가 새겨지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비석은 무슨… 요란스레 흔적을 남길 생각이 없어요. 우리 장묘문화도 자연장이나 수목장 이런 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문득 함형수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이란 시가 생각나네요.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중략)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를 읊는 그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문학청년이었다는 그를 언젠가 작가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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