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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 학문사투리, 쉬운 우리말로 바꾸면 철학의 새 길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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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 학문사투리, 쉬운 우리말로 바꾸면 철학의 새 길 열려"

입력
2013.02.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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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무'→ '있음/없음' '운동'→ '함과 됨'서양 존재론 풀이하며 '윤구병 철학' 전개"진리라고 통하는 것을 지우는 것이 내 몫… 거짓 판치는 세상에서 문화혁명의 도구 됐으면"

철학자, 동화 작가, 출판사 사장, 생태 운동가…. 하는 일이 많아 그냥 '농부철학자'로 불리는 윤구병(70) 보리출판사 대표가 농부가 된 건 17년 전이다.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충북대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나도 불행하고 학생도 불행한" 철학을 그만 가르치겠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와 교육을 병행하는 생산공동체 마을인 '변산공동체'를 만들었다. 출판사 수익금으로 변산공동체의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고, 거기서 나온 농산물로 밥을 짓는 식당 '문턱없는 밥집'을 마포구에 운영한다.

그런 그가 이번 주 철학서를 출간했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란 부제를 단 이 책은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5~445)로 대표되는 플라톤 이전의 그리스 존재론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책이다. 1,3부는 2007년 연구실 '수유너머'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2부는 1995년 서울대 철학과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을 지도한 내용을 대화체로 풀어놓았다. 20일 파주 출판사에 만난 윤 대표는 "나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한" 철학 공부를 계속 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저도 선생님들한테 어려운 학문용어로 말하고 글 쓰는 법을 배웠어요. 존재, 무, 선, 악, 진리나 허위가 뭔지 저도 모르면서 질문 받고 강의했죠. 선생인 저도 모르고, 학생은 더 모르는 걸 배우고 가르치면서 평행선을 달린 거죠." 이 한계의 돌파구는 윤 대표가 '학문 사투리'라고 일컬은 '존재' '무' '진리' 등 딱딱한 서양철학의 개념어들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었다. 윤씨는 96년 변산공동체를 열었을 당시를 회상하며 "어린 시절의 일상어를 다시 배웠다"고 회고했다.

"농사짓는 법을 어르신들께 배워야 하잖아요. 그때 '콩 언제 심어요?'라고 물어보면 될 걸 '대두는 언제 밀식하는게 좋습니까?'라고 물었다니까요. 근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웃음) 그때부터 일상어를 다시 배운 거죠. 어린애가 말 배우듯이."

책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지 않는 '존재', '무'같은 철학 용어를 '있음'과 '없음'으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어 '있는 것이 있으면 좋은 것' '없는 것이 있으면 나쁜 것'등으로 참과 거짓의 개념도 우리말로 바꾼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완성되는 동일률은 'ㄱ은 ㄱ이다'로, 배중률은 'ㄱ은 ㄱ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지 ㄴ도 아니고 ㄷ도 아닌 것은 없다'로, 모순율은 'ㄱ은 ㄴ이 아니다'고 바꿔 설명한다. "두루뭉술"하게 이런 개념을 맛보인 수유너머 강연을 푼 1,3부는 철학을 동화로 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처럼 쉽게 다가오지만, "이 잡듯이 논증한" 서울대 강의를 푼 2부는 "그때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는 윤대표의 말처럼,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법 어렵게 읽힌다. 저자는 파르메니데스부터 제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서양철학자의 핵심 개념을 풀며 철학의 근본 문제가 '있음과 없음'(존재), '함과 됨'(운동)에 있다고 말한다. 근대 헤겔, 베르그송, 마르크스와 현대 실증과학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의 주요 이념을 논증하며 희랍어, 라틴어 어원을 책장마다 풀이하고 도표를 곁들였다.

윤 대표는 "우리말은 세계 어떤 말보다 존재론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사유 구조를 갖고 있다. 돌 지나고 배우는 말, 가장 쉽게 쓰는 말들로 생각을 갈무리하는 데서 이 가능성(존재론을 사고하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있는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거잖아요? 자유, 평화, 평등, 우애, 관용, 이런 것은 인류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있을 것, 억압, 착취, 전쟁, 탐욕, 이기심 이런 것은 좋은 세상 만드는데 없어야 할 것이잖아요? 참과 거짓을 나누는 기준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 이게 우리말로 철학하는 거죠."

윤 대표는 희랍어, 라틴어를 비롯해 서양철학의 정밀한 연구방법을 가르친 스승 박홍규(1919~1994) 전 서울대 교수에게 이 책을 바치면서 첫 머리에 이렇게 썼다. '자네! 또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꾸짖으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능청스럽게 딴전을 펴야지./ 입만 벌리면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나와요. 헤헤'

윤 대표는 "어떤 이론이든 가설을 바탕으로 논증하는 구조로 돼있는데, 가설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모든 진리는 거짓말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알고 있던 것을 전부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마련하는 게 내 몫이라고 봐요. 그 깊이 있는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주신 분이 나에게는 박홍규 선생님이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한" 철학책을 왜 지금 읽어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거짓말이 판치는 세상을 참말만 하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라고 답했다.

"'진리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참 거짓을 알아보자는 거죠. 현실세계에서 거짓말을 하게 하는 일상적인 장치와 구조, 공포 분위기를 형성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거짓말할 수밖에 없죠.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 책이 문화혁명의 도구로 쓰이길 바랍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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