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에서 가짜 임금 하선의 멘토 역할을 하게 되는 인자한 조내관역을 연기한 분은 배우 장광씨다. 그는 오랜 시간 성우로 활동하다가 2010년 영화 '도가니'에서 파렴치한 교장과 행정실장 1인2역으로 영화에 정식 데뷔했다. 영화시사회가 끝나고 뒤풀이장에서 나는 술에 취해 장씨에게 다가가 "미안한데 한 대만 때려도 되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몇 해가 지나'광해'를 준비하면서 광대 하선이 성군이 되기까지 결정적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하는 조내관역의 배우 선정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감독이 장씨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아니 이런 인자하고 학식 높고 인품이 훌륭한 역할에 어린 장애인을 그것도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을 유린한 역할을 한 사람을 어찌 캐스팅하겠느냐"며 극구 만류했다(혹자는 우스갯소리로'도가니'에서 나쁜 짓을 해 그 벌로 거세를 당해 내시가 되었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감독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나는 고심 끝에 "그럼 오디션을 보자"고 했다. 결국 장씨는 연배가 높은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오디션을 치렀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본성 역시 선하고 착해 조내관역에 딱 맞았다. 나와 감독은 두말없이 장씨를 캐스팅하였다. 영화를 만든 후 시사회장에서 영화 관계자와 동료들은 그를 두고 적역의 캐스팅이었다고 극찬했다. 당시 나는 내가 장씨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그를 보자마자 시나리오에서 걸어 나온 줄 알았다"며 허풍을 떨었다. 장 선배는 지금 그 연배의 연기자중 캐스팅 1순위다. 그가 이렇게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건 6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여기에 또 한 명 '영화계의 대세'라고 일컬어지는 배우 류승룡이 합세했다. 2011년 영화 '활'을 필두로 2012년 '내 아내의 모든 것', '광해' 그리고 올해 '7번방의 선물'까지 대한민국영화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4연타석 홈런을 친, 네 영화의 누적관객수가 3,000만명을 돌파한 배우가 바로 그다.
하지만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무명의 설움을 겪은 배우라는 사실을 관객들은 잘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는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의 초기 멤버이다. 6년간 공연을 하면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지금도 그는 근육통과 '스포츠엘보'로 고생하고 있다. 당시 난타공연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대학로 연극과 뮤지컬, 그리고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손을 쉽게 잡아주지 않았다.
기나긴 무명생활이 계속되자 그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더 이상 가족을 고생시킬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고, 대학 은사를 찾아가 연기를 그만두어야겠다며 고된 심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은사는 벼락같이 화를 내며 만류했지만 류승룡은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더는 배우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스승은 이에 "모든 꽃은 봄에만 피는 게 아니다. 어떤 꽃은 여름에도 피고 가을에도 피고, 이 추운 겨울에도 매화는 피어나는 것이다"며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결과 류승룡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어떤 배우와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매력과 안정된 연기력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장광씨가 세월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꿈을 접었다면, 류승룡씨가 현실의 어려움으로 연기를 그만두었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다.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세간에 흘러 다니는 힐러들의 문구처럼 그들을 격려하거나 위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오늘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오늘의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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