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미 연방수사국(FBI) 조직을 완성한 것은 유명한 에드가 후버였다. 법무부 산하에 설치된 일개 검찰국(局)을 전 연방을 포괄하는 거대한 범죄수사 및 정보조직으로 확대한 게 그였다. 방대한 국가정보를 틀어쥐고 1972년 사망 때까지 48년 간 '밤의 통치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루스벨트부터 닉슨에 이르기까지 6명 대통령 모두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적에 대한 정보수집 등의 불법지시로 거꾸로 그의 덫에 걸렸던 것이다.
■ 무려 2만 명이 넘는 직원을 보유한 규모에다 의회나 대통령조차 수사ㆍ인사에 간여할 수 없는 막강 권한의 FBI와, 연구관을 합쳐 상시 검사인력이 10명도 안 되는 우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승만 정부 때 처음 구상한 대검 중앙수사국의 모델은 FBI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그나마 정보기능은 대부분 중앙정보부가 장악하고, 검찰총장의 명령을 받아 중요범죄를 수사하고 지휘하는 조직으로 업무가 축소됐다.
■ 그래도 중수부의 위용은 대단했다. 무엇보다 경찰이나 일반 검사들로선 버거운 '거악(巨惡)' 척결의 상징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수부의 업적은 작지 않다. 82년 이철희ㆍ장영자부부 어음사기,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은폐, 현직 대통령 아들을 잇따라 구속시킨 김현철(97), 김홍업ㆍ홍걸(2002) 사건이 대표적이다. 비록 전직이었지만 전두환ㆍ노태우 두 대통령을 처벌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 그러나 중수부는 칭찬보다는 늘 '정치권력의 시녀'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전신인 중앙수사국의 첫 수사도 64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폭로한 야당의 김준연 의원을 구속한 것이었으니 처음부터 정치적 한계를 배태한 출생이었던 셈이다. 결국 중수부는 이제 반세기에 걸친 영욕의 세월을 접는다. 검사윤리강령의 첫 조항만 잊지 않았어도 이런 수모를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국법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인권을 보호하며, 정의실현을 사명으로 하겠다'는.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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