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그룹 오너인 정용진 부회장이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에서 전격 사퇴했다. 재벌가 경영인으로서는 첫 사례다. 신세계는 어제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이라고 밝혔다. 재계는 이마트 노조설립 방해 파문 등 잇단 경영비리에 따른 위기를 돌파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퇴에도 불구하고 정 부회장의 일상 업무와 직책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경영책임만 피하려는 '꼼수'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 부회장은 2007년 증여세 3,500억 원을 납부하고 윤리경영을 전면에 내세우며 경영일선에 나섰다. 하지만 지난해엔 그룹 차원에서 동생 정유경 신세계부사장이 지분 40%를 보유한 계열사 베이커리를 부당 지원해 공정위 과징금과 함께 검찰조사까지 받았다. 최근엔 이마트 노조 설립 방해공작 파문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 정 부회장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정 부회장의 사퇴를 꼼수로 보는 시각은 불명확한 진퇴 때문이다. 사실 경제민주화 흐름을 타고 경영비리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서 재벌 오너들이 등기이사 등 책임질 자리를 회피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예상을 깨고 등기이사에 오르지 않은 것도 경영권 승계 속도조절과 함께 경영책임 문제를 고려했다는 시각이 있다. 최태원 SK회장은 지난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서 물러나면서 그룹경영 의사결정 권한을 모두 내놓기도 했다.
점진적으로나마 대기업 전문경영인체제가 확산되는 건 바람직하다. 오너가 미흡할 땐 전문인이 책임과 권한을 갖고 회사를 이끄는 게 주주 이익에 더 충실히 부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너들이 의사결정을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는 국내 기업현실에선 전문경영인체제가 오히려 오너의 법적 책임을 면탈하기 위한 편법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크다. '경영은 하되, 책임은 안 지겠다'는 오너들에 대한 법률적 대비책이 강구될 필요가 있다. 정 부회장은 보다 진지한 진퇴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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