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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락한 풍경 메우는 젊은 예술 어렴풋이 옛기억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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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락한 풍경 메우는 젊은 예술 어렴풋이 옛기억을 떠올리다

입력
2013.02.2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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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으뜸 원(元)자는 '빈티지'로 해석된다. 대구탕, 아구찜집부터 밤무대 그룹사운드, 회사 이름까지 원자 붙으면 오래되고, 낡고, 그래서 향수를 자극하는 대상이 된다. 큰 도시엔 대개 고층빌딩이 솟아오른 신도심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도심의 지위를 물려주고 후줄근하게 남은 옛 번화가에도 원자를 갖다 붙인다. 이름하여 원도심. 어딘지 짠한 감성이 퇴락해가는 거리를 에테르처럼 메우고 있는 공간이다. 대흥동은 대전의 원도심이다. 그런데 이 동네, 풍경이 조금 수상하다. 낡은 겉모습은, 비유하자면 이가 빠진 복(福)자 사기그릇인데, 거기 담겨 찰랑이는 건 사이폰으로 추출한 스페셜티 커피 같은 젊음이다.

기차 타고 대전역에서 내리면 역전에 보이는 시장이 중앙시장이다. 한때 대전은 물론 호남 상권을 호령하던 큰 시장이었다. 그랬다지만 지금은 대형마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는 얘기는 다른 재래시장이나 매일반. 여하튼 이곳을 걸어 지나면 대전천이 나오고, 개울 건너 요샌 '로데오 거리'로 불리는 번쩍번쩍한 으능정이 거리를 지나쳐 대흥동에 닿는다. 거기서 몇 걸음 더 가면 옛 충남도청. 요컨대 대흥동은 기차역과 관공서 사이에 형성되던 일제시대 계획도시 공식에 딱 들어맞는 공간이다. 20~30년 정도의 내력은 음식점 간판에 써 붙이기 면구스러운 오래된 골목들이 얽혀 있다. 그렇게 '빈티지한' 기분에 취해 걷다가, 문득 서울 홍대 앞에서나 볼 법한 예쁜 카페, 작은 소극장과 마주치게 된다.

"이곳은 본래 대전의 문화예술 1번지였어요.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예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지냈죠. 1970, 80년대 밴드를 하던 양반이 바(bar)를 운영하면서 지금도 만날 록음악만 틀고 그런 식이에요. 20대의 문화만 있는 다른 곳과 대흥동이 다른 점은 아마 그런 점일 거예요."

산호여인숙 주인장 송부영(35)씨의 말이다. 송씨에 따르면 대흥동은 그 또래들이 어릴 때 그냥 '시내'로 부르던 곳이었다. 이제 그 시내 역할은 둔산동 같은 신도심이 하고 있고, 대흥동엔 한때 흥성했던 거리의 뒷모습, 그리고 대전 한복판에서 꽃피웠던 문화의 흔적만 남았다. 대흥동 거리를 걷다 보니 생명력이 더 긴 것은 예술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권이 쇠락하는 것은 막을 길이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제각각 가치를 좇는 젊은이들은 다시금 대흥동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일테면 어른들 바둑 두시는 기원, 오래된 서예학원 곁에 새로 들어선 마임연구소 같은 것. 대흥동엔 각각 예닐곱 개의 소극장, 갤러리가 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북카페, 밤이면 공연장으로 탈바꿈하는 바도 하나 둘 늘고 있다.

대흥동엔 이름만으로는 정체가 아리송한 간판이 여럿 있다. 그 정체를 탐문하고 다니는 것이 동네 산책의 재미다. 는 '아임아시아'가 아니라 '아이맛이야'라고 읽어야 한다. 10여명의 결혼이주 여성들이 밥하고 서빙하는 아시아요리 전문점이다. 지난해 봄 문을 열었다. 팟타이(태국 볶음국수), 나시고렝(인도네시아 볶음밥) 등 6개국 10여가지의 요리를 선보이는데,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다 값도 다른 곳보다 절반 가까이 저렴하다. 대흥동 안내를 맡아준 송씨 부부의 도 이게 뭐 하는 곳일까 싶은 공간이다. 1977년 문을 연 낡은 여인숙의 1층은 지금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2층은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무려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암만 봐도 일반 가정집인 는 젊은 미술가들의 작업실 겸 전시 공간이다. 본래 갈마동의 반지하 건물에 있던 '반지하'가 두어 해 전 대흥동의 일반주택 2층으로 옮겨 이름을 바꿨다. 는 100여년 전 대전부윤의 관사였던 곳. 폐건물로 방치됐다가 지금은 공연과 전시가 어우러진 문화공간으로 쓰인다. 커피도 팔지만, 카페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장삿집 분위기는 거의 안 난다. 매달 첫째, 셋째 토요일에 '새마을 프로젝트: 돌아온 목척시장'이라는 벼룩시장이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는 공정여행을 기획하는 사회적 기업. 반면 는 여행사 같은데 들어가보면 카페다. 주인장이 축구 마니아라 여러 나라의 유니폼이 걸려 있고, 인디밴드의 공연도 열린다.

"그냥 카페 거리, 소극장 거리라면 이곳도 머잖아 상업화되고 말 거예요. 그래서 대흥동 사람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죠. 품앗이는 그 대안 중 하나고요."

낡은 골목의 애잔한 느낌 속에 자그마한 카페들이 오종종 모여 있는 모습은 이제 어느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풍경이 됐다. 처음엔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그 빈티지한 느낌이 값비싼 소비재로 둔갑하는 것도 일반적 현상. 대흥동의 지역공동체 운동단체인 원도심레츠는 그런 변화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다. 원도심레츠의 이종현씨는 "아직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단계지만,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한 곳이 대흥동"이라고 설명했다. 원도심레츠에 가입한 업소(단체)에선 '두루'라는 일종의 지역화폐가 통용되는데, 물품이 없다면 재능으로 두루를 벌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는 품앗이. 월, 수, 금 원도심레츠에 들르면 현미로 지은 무공해 밥상(3,000원+2,000두루)도 맛볼 수 있다.

대흥동 골목을 돌다 보니 최근 1, 2년 새 새로 지은 것 같은 건물이 부쩍 많이 보였다. 4, 5층 규모의 다세대주택과 상가들이다. 충남도청이 내포신도시로 이전된 뒤 원도심 재개발 문제가 대전시의 뜨거운 감자가 됐는데, 시가 갈피를 잡기도 전에 집주인, 땅주인들은 서둘러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짓고 있다. 그 와중에 1929년 지어진 대흥동 뾰족집(대전시 등록문화재 제377호)도 철거됐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 예술인들의 터전이, 젊은 작가들이 새로 둥지를 튼 공간들이 그 재개발 바람 앞에서 위태로워 보였다. 반세기 넘은 권투체육관과 배고픈 예술가의 작품이 걸린 북카페가 공존하는 풍경 속을 5년 뒤, 10년 뒤에도 걸어볼 수 있을까.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예술이 돈보다 명줄이 길다는 게, 이곳 대흥동에서 얻는 깨달음이다.

여행 수첩●대전지하철 중앙로역에 내리면 바로 대흥동이다. 4, 5번 출구로 나오면 대흥동 볼거리들이 모여 있는 블록이다. 대전역에서부터 중앙시장을 둘러본 뒤 걸어도 20여분이면 닿을 수 있다. ●대전문화연대(042-222-2117), 공정여행 기업 공감만세(042-335-3600), 월간 토마토(042-320-7151) 등에서 대흥동 여행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산호여인숙(070-8226-2870)은 대전 시내에 유일한 게스트하우스. ●매년 8월 무렵 동네 축제인 '대흥동립만세'가 열린다. 지역 예술가들이 자유분방하게 참여하는 프린지 페스티벌 성격.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 오후 카페 안도르(042-222-3101) 주변에서는 예술 벼룩시장이 열린다. 80여 팀이 참가해 빈티지한 작품을 선보인다.

대전=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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