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는 염색하지 않은 백발을 유지하는 판사들이 유달리 많다. 새치 몇 가닥만 보여도 염색약을 찾는 대다수 중장년층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왜 그럴까.
19일 본보 취재 결과 평균 연령 51.5세인 서울고법 형사부 부장판사 13명 중 7명이 반백발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취임 이후 한 번도 염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양승태 대법원장도 백발이다. 정치인이나 고위관료들이 젊고 활기찬 이미지를 주기 위해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대표적 여성 법관인 김영란 전 대법관, 조경란 법원도서관장도 자연스런 흰머리를 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재판 당사자의 승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권위와 관록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판사 직업의 특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과거 유럽의 판사들이 흰 가발을 썼던 것과 같은 이치다. 백발인 한 고법 부장판사는 "건강상 이유로 염색을 피하기도 하지만, 백발이 갖는 중후한 이미지가 법정의 권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백발이 성성했던 판사들이 변호사 개업 후에는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것을 봐도 머리색과 판사 직업의 연관성은 확인된다. 법원장을 지낸 뒤 대형 로펌 대표로 간 한 변호사는 판사 시절 자랑했던 은발을 곧바로 염색했다. 판사 때는 벗겨진 머리를 유지하다가 개업 후 가발을 쓰는 변호사들도 적지않다.
나이와 권위를 유난히 연관시키려 하는 우리사회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는 견해도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판사들은 법정에서 어려 보여서 유리할 게 없다"며 "동안인 판사들은 일부러 굵은 뿔테 안경을 쓰거나,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립스틱을 쓰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판사는 "고령의 원고와 피고들이 '판사님이 세상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이라고 운을 떼는 경우도 있다"며 "나이 40이 된 후에야 재판이 편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젊은 판사들은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최근 법원 인사에서 단독 재판장으로 발령받은 5년차 판사는 "재판 당사자들이 나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판사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느낄 때"라며 "판사가 충분히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 절차적 만족감을 주면 나이에 대한 불신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앳된 외모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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