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나를 위안해주고 확인해주는 건 문학이 아니에요. 내게 도전해오는 것, 나의 상처를 벌리고, 나 자신을 낯설게 하는 것 그게 문학 아닙니까."
불문학자이며 문학평론가인 정명환(84) 전 서울대 교수는 그의 새 책 (현대문학)을 들고 찾아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누군가를 다독이는 것이라기보다, 익숙해진 것들을 낯설게 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에 틈을 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군대에서 쓰기 시작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공책에 기록한 단상을 묶은 이번 책에는 그 같은 문학적인 삶의 태도가 일관되게 녹아 들어 있다. 짧게는 한 줄, 길게는 몇 쪽에 이르는 글에서 시대를 꿰뚫는 지적 통찰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인문학자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은근한 즐거움까지 느끼게 된다.
"이 정도면 적어도 독자들에게 반면교사 노릇은 할 수 있겠다 싶은 것들로 추렸어요. 평소에도 위선이 제일 싫지만, 이제 이 나이에 위선 부릴 것도 없고 다 톡 까놓는 거죠."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가 7년 만에 펴낸 이 책에는 실존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문학 이야기뿐 아니라 음악, 철학 등 인문ㆍ예술 분야의 다양한 체험과 견해들, 때로는 추하고 낯뜨거운 한국 지식사회의 풍경, 가족 이야기를 비롯한 개인적 일상과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천착까지 다채롭게 담겨있다.
책에는 연도를 가리면 요즘 얘기로도 읽힐,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 대목들이 수두룩하다. 'TBC 방송국과 신세계백화점은 모두 이병철의 사업체이다. 그는 자기의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을 자기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이용하여 널리 알리고 자기의 백화점에서 판다. 시민들은 그 광고를 보고 좋은 제품을 백화점에서 사게 되는 혜택을 받는 듯이 착각하지만, 영세한 소매상인들은 그것 때문에 파산하고, 시민은 그의 자본을 자꾸만 더 축적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1965년의 단상이다. 여기에 지식상인이 되어 자본의 돈벌이에 부역하는 지식인들까지…. 지금, 이곳에 대한 묘사로 읽어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 긴 세월 동안 역사가 발전이 안 됐다는 얘기니 참 슬픈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 전 교수는 책에서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세계대전도, 공산주의의 생멸도 아닌, '안이한 유혹으로 주체적 사색의 상실을 유발하고, 문화적 가치의 총체적인 저하를 가져오고, 인간을 다스리기 쉬운 군중으로 만들어놓는 텔레비전의 발명'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꿈을 죄다 연예인으로 통일해버린 가공할 위력의 '바보상자' 말이다. "제가 사는 아파트가 1983년에 지은 건데, 그때는 거실 양 벽면 책장이 기본 옵션이었어요. 한때나마 부르주아들이 보였던 교양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열등감, 허영, 이젠 그런 것조차도 없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실존적 문제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이 노(老)인문학자는 두렵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형해만 남아, 소수의 지배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나머지는 억압을 받으면서도 그 억압을 오히려 기꺼워하는 시대입니다. 지식인의 말이 먹히지 않지만, 그가 지식인이라면 별 수 없이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밑 빠진 독에도 언젠가 물이 고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요."
정 전 교수에게는 김현 김승옥 김화영 이인성 정과리 같은 한국 문학의 대들보를 키워낸 스승이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된 데 공헌한 건 전혀 없고 우연히 만난 선생이었을 따름"이라며 웃었다.
글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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