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도, 감독도, 정치인도 아니다. 문화관광부 정통관료로는 그가 처음이다. 꼭 관료 출신이 장관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경험이 풍부한 문화예술인, 문화적 감각을 가진 정치인도 얼마든지 장관을 할 수 있다. 관료출신이라고 더 좋은 정책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현장 문화예술인을 장관으로 발탁해 멋지게 성공한 나라는 프랑스다. 작가인 앙드레 말로와 자크 랑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거세게 몰아치는 문화제국주의에 맞서 자국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고 키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 산업화와 국민의 문화 접근성도 확대시켰다. 우리도 그것을 흉내 냈다.
그러나 정작 알맹이는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만 집착했다. 처음에는 그나마 나았다. 작가 출신인 초대 문화부장관은 그 상징적 존재만으로도 국가와 국민들에게 문화의 소중함을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어진 문화예술인 출신 장관들은 한낱 정권의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위한 깜짝 이벤트나 피에로에 불과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장관 자리를 정권 창출의 공로로 받는 부상이나, 자신의 정치 경력을 더 화려하게 하는 '쇼' 무대쯤으로 여겼다.
결과는 어땠나.'창의한국' '문화강국'은 말뿐이었다. 어느 영화감독 장관은 자신의 소신을 무너뜨리고 정권의 주문대로 스크린쿼터 축소에 찬성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배우 출신 장관은 청와대가 인사개입을 은폐하려고 거짓으로 쓴 해명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읽었다. 또 어느 배우는 이념의 잣대만을 들이대 무리하게 사람들을 쫓아냈고, 어느 정치인은 어떻게 행동하면 장관 자리를 다음 선거에 이용할 수 있을까에 매달렸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 문화는 정체성을 잃었고, 문화행정은 실종되고, 문화예술인들은 편가르기와 적개심에 빠졌고, 문화가 돈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낳았다.'문화부장관 유진룡'이 반가운 이유는 적어도 그는 이런 폐단을 반복하지는 않고 문화를 문화답게, 문화인을 문화인답게 이끌 수 있으리란 믿음과 기대에서다. 오랜 시간 만나온'유진룡'이란 사람은 그렇다.
단순히 2006년 "배 째 드리죠"파문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이 부당하게 간섭하는 세상이 싫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소오강호(笑傲江湖)를 부르는 것이, 아무리 자리에 미련이 없다고는 하지만 차관으로서 신중하지 못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보다는 정직과 겸손, 그리고 일에 대한 공평무사와 전문성이 있기 때문이다. 떠난 지 7년이 지났지만, 그를 기억하면서 문화부 내부에서 기꺼이 그를 반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 많은 일화와 사건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는 역시 차관을 지낸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과 함께 국립공원에서 딴 과일 한 알조차도 사사로이 받지 않은 문화부의 '전설'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홍보수석은 내 자리가 아니라며 물리치면서도,"문화행정의 경험을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그보다 훨씬 작은 제2기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은 맡아 인사권 침해라며 위원장직무대행이 사무처장을 임명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을지대 교수를 그만두고 가톨릭대로 옮긴 이유 또한 부당한 간섭과 통제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조차 쇼이고 계산된 전략일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옳은 방향이라면 박수를 받을 일이지 욕할 일은 아니다. 또 인간은 그렇게 자신을 오래, 어디에서나 감추면서 살 수는 없다. 물론 그라고 100%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의 말처럼 "한 자 되는 나무에는 반드시 마디가 있고, 한 치의 옥에는 반드시 작은 흠집은 있게 마련"이듯, 부인이 위장전입을 한 적도 있다. 그의 문화행정 철학이 꼭 이 시대 문화의 정도(正道)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다만 장관 내정 축하문자에 "자리가 바뀐다고 인간이 바뀌진 않는다"는 짧은 답장에서 그가 배우와 감독과 정치인들이'쇼 비즈니스'의 무대로 삼아온 문화와 문화행정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란 믿음만은 느껴진다. 그래서'문화관광부장관 유진룡'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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