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새벽 2시, 일명 유황도로 알려진 일본 도쿄 남쪽 오가사와라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에 무수한 포탄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미국 해군 함대에서 발사된 포탄들은 칠흙 같은 어둠을 환하게 밝혔으며, 이어 공군 폭격기 100여 대가 출동해 한꺼번에 폭탄을 투하하며 섬의 이곳 저곳을 초토화시켰다. 날이 밝아오며 이름처럼 불바다로 변한 이 섬을 향해 미 해병 5사단을 주력부대로 한 해병대 병력들이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이 된 이오지마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44년 여름, 마리아나제도를 손에 넣은 미군은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까지의 장거리 폭격을 개시했지만 이오지마 섬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수시로 제로 전투기 등을 이륙시켜 미군의 장거리 폭격을 저지했다.
일본군은 미군의 공중 폭격을 예상하고 해안 방어선을 포기하는 대신 땅 속에 깊은 굴을 만들었고 병력들을 지하 곳곳에 배치해 결사항전의 자세로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월 19일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3일 안에 전투를 끝내리라는 예상과 달리 일본군의 새로운 작전 변환에 고전하기 시작했다. 11만명에 육박하는 미군들은 마침내 전투 나흘만인 23일 오전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국의 상징인 성조기를 게양했다. 일본군에게 7번이나 패퇴한 뒤 8번째 격전을 치르고 나서야 얻은 승리였다.
이 순간은 AP통신의 조 로젠탈이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오지마의 깃발'이라 불리는 이 사진 속에서 성조기를 꽂고 있는 6명의 해병들은 미국의 전쟁 영웅이 됐으며 로젠탈은 이 사진으로 그 해 퓰리쳐 상을 수상했다. 한 장의 사진이 가져온 효과는 대단했다. 미국인들은 이 사진을 통해 희생 정신과 용기를 얻었으며 전쟁은 끝났다는 승리의 확신과 자부심으로 휩싸였다.
하지만 이 장면은 후에 연출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최초의 성조기 게양은 급하게 준비한 파이프에 국기를 매달은 엉성한 모습이었지만 이 장면을 놓친 로젠탈이 좀 더 보기 좋고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오지마 전투의 실상은 사진이 전하는 정취처럼 힘차거나 낭만적이지 못했다. 이 날로부터 30여 일이나 더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2만 여명이 사망했고 미군도 6,000 여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만 5,000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실제 전투의 참상과 사진 한 장이 만들어낸 영웅담간의 괴리는 영화 소재로도 사용됐다.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을 통해 일본군과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 본 시각을 각기 표현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이오지마는 미국의 공군기지로 사용되다 68년 일본에 반환됐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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