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워싱턴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신경써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워싱턴의 싱크탱크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수많은 의제를 놓고 하루에도 수십차례 이상 열리는 세미나와 포럼, 토론회 중에서 특파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북핵 관련 행사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한반도 전문가가 대부분 워싱턴의 싱크탱크에 포진해 있고, 이들이 미국 조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싱크탱크를 쫓아다니느라 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면 뭔가 허전했다. 신문지상에 수없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전문가들의 고견이라는 게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저 그런 전망과 감동 없는 진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몇 번을 빼고는 싱크탱크 행사를 크게 기사로 쓴 기억이 별로 없다.
이런 실망은 곧 체념으로, 현실에 대한 수긍으로 바뀌었다. 이들도 북한에 대해 뾰족한 정보를 갖고 있을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민간 사이의 회전문 인사가 흔한 미국 정치의 특성상 이런 현실은 미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 당국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언젠가 '6자회담은 여전히 유용한 틀'이라는 새롭지 않은 결론을 낸 토론회 뒤끝에 문을 나서는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재단 이사장에게 '정말 6자회담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웃으며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비핵화가 존립 목적인 6자회담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 전문가들이나 행정부 당국자들이 입버릇처럼 6자회담을 강조하는 것은 그걸 빼고는 북한에 대해 어찌 해볼 방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북핵을 없앨 수 있는 실용적 도구로서가 아닌 미국이 북핵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정치적 연결고리로 6자회담을 생각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에 이어 3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6자회담은 죽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다. 2008년 6월 미국 CNN이 전세계에 떠들썩하게 생중계한 북한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장면도 희대의 사기극으로 기록되게 됐다.
북핵 문제에 대한 백가쟁명식 해법이 쏟아진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해법의 초점을 비핵화가 아닌 비확산으로 바꿔야 한다는 기류도 나오는 듯 하다. 예전에는 북한이 자신을 핵보유국이라고 주장하는 게 억지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우리가 북핵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억지처럼 들리는 판국이니 비핵화만 고집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비핵화든 비확산이든 그것은 이제부터라도 정책 당국자들이 심각히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그 전에 미국만 믿고 6자회담의 허상에서 허우적댄 지난 20년 동안의 무개념 외교는 반드시 반성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안보 상황에서 떠오르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안보환경은 가혹하다. 주변이 온통 아랍의 가상 적국들뿐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우방국은 전세계에서 미국이 거의 유일하다. 안보 위협에서도, 미국에 대한 절실함에서도 이스라엘의 처지는 결코 우리보다 덜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미국에 절대 끌려 다니지 않는다. 미국이 내놓는 중동해법이라도 자신의 안보이익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면 미국과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외치는 이란의 핵무장을 놓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단독으로라도 이란을 공습하겠다며 이를 말리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수차례 얼굴까지 붉히는 싸움을 하고 있다. 안보에서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이스라엘 정부의 외교에 대해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이스라엘의 전방위적 대응이 이란의 핵개발 행보를 주춤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안보외교는 다른 나라를 추종하거나 편승해서 될 일이 아니다. 누구도 우리의 안보를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재삼 새기는 계기가 돼야 한다.
황유석 국제부 부장대우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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