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에는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대형버스다. 창문 하나 없는 차체는 검정색으로 무광도색이 됐고, 겉에는 미국 수사드라마 제목 'CSI(Crime Scene Investigation)'가 굵은 주황색으로 새겨졌다.
얼핏 영화나 드라마 촬영용으로 보이지만 이 버스는 전국에 순차적으로 배치 중인 이동식 현장증거분석실(일명 CSI버스)이다. 경찰은 '증거는 현장에 있다'는 수사의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대당 가격이 6억2,000만원인 이 버스를 도입했다. 헌데 사건사고 현장이 아닌 지방경찰청 주차장을 주로 지키고 있다는 게 문제다.
17일 경찰청에 따르면 CSI버스는 2010년 11월 경기ㆍ전남ㆍ경북경찰청에 각각 1대씩 내려간 데 이어 지난해 4월 서울ㆍ대구ㆍ전북경찰청에도 배치됐다. 지난달 부산ㆍ경남ㆍ제주경찰청에는 경찰이 자체개발한 'KCSI'를 붙인 버스가 배치돼 현재 모두 9대의 CSI버스가 운용 중이다.
CSI버스에는 CCTV영상분석기 지문ㆍ족적검색시스템 원심분리기 몽타주시스템 초음파세척기 거짓말탐지기 증거물보관용 냉동ㆍ냉장고 등 약 28가지 장비가 탑재됐다. 이 버스만 끌고 나가면 현장에서 모든 과학수사를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정작 출동실적은 저조하다.
지난해 서울과 경기 등 6개 지방경찰청에서 CSI버스 6대는 총 169차례 출동했다. 월 평균 출동건수는 서울이 3.9회로 가장 많고, 경북이 1.2회로 최소다. 서울에서는 한 달 30일 중 약 26일간, 경북에서는 하루 빼고 무려 29일 가까이를 주차장에 있었다는 의미다.
출동이 뜸한 데는 이유가 있다. 워낙 고가에다 덩치가 커 운전이나 주차가 쉽지 않다. 범인이 잡혀 현장에서 증거를 분석할 필요가 없거나 소소한 절도 사건 등을 위해 나가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이러다 보니 지난해 8월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화재, 올 1월 서울 강서구 외발산동 버스차고지 방화사건 등 주로 화재 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면허가 있어도 운전이 쉽지 않고, 주차도 대로변에서만 할 수 있다"며 "사건 현장이 어떤 곳일지 알 수 없어 무조건 끌고 나가긴 힘들다"고 말했다.
내부적으로도 경찰서 등에서는 "비싼 장비를 놀리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경찰은 "주차가 어렵다"는 직원들 하소연에 지난해에는 35인승 버스를 개조했지만 필요한 장비가 다 들어가지 않아 올해 배치한 버스는 다시 45인승으로 회귀하는 등 시행착오도 겪는 중이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부산=강성명기자 sm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