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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죽음 사이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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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죽음 사이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의 초상

입력
2013.02.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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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하는 엄마 살해한 고3 수험생굴뚝에서 농성하는 남편을 둔 타워팰리스 가사도우미용산참사 지켜보는 오디세우스시대의 욕망이 남긴 상처들 조망

어느 소설가가 고교생 친모살해,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사태,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실제 사건들을 소설화 했다고 하자. 그때 까다로운 독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의구심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실제 사건이 가진 그 자체로 강렬한 문학적 성격을 단지 편취하려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주는 충격으로 자신의 문학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런 뜨거운 실화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작가에게는 둘 중 하나의 심리적 밑천이 필요하다. 자신감 아니면 만용. 너무 강렬한 것은 현실에선 사건이 되지만, 문학에선 신파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정찬(60)은, 그러나, 활공을 자유로이 비행하는 날렵한 새처럼 유려하고 매끄러운 몸짓으로 이 위험을 넘어서는 등단 30년 작가의 노련함을 보여준다. 소설집이니만큼 각 단편들 간 성취의 편차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 여기의 가장 첨예한 모순들이 작가의 탄탄한 소설 작법과 만나 두껍게 각질이 쌓인 우리의 감각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한다.

신문 사회면을 오랜 기간 점거했던 여러 사건들을 에두름 없이 호명하는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강력하게 독자를 뒤흔드는 작품은 표제작 '정결한 집'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것은 전교 1등을 하라며 피칠갑이 되도록 골프채를 휘두른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이 시신과 수개월간 동거하며 수능시험까지 치른 그 충격적 사건이다. 작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소설의 전통적 장치를 통해 소년과 어머니, 여기에 상상으로 덧댄 소년의 여자친구까지, 각 인물들의 심중을 넘나들며 엇갈린 욕망과 뒤틀린 관계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비극은 소년이 '자신의 꿈과 어머니의 꿈이 다르며, 그동안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의 꿈에 의해 훼손되어왔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시작됐다. 성적은 뚝뚝 떨어졌고, 실패한 결혼을 아들의 세속적 성공으로 벌충하려 한 어머니는 골프채를 들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머니에게 버림받는 것은 더 두려웠다. '어머니는 소년을 집어삼킨 거대한 괴물인가 하면,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 성모이기도 했다.'(19쪽)

간결성을 미덕으로 숭앙하는 언론 기사들이 누락시키는 사소한 팩트들, 어쩌면 진실은 그 누락들 속에 있을지도 모르다는 의심은 소설가의 직업윤리다. 그 윤리는 장성한 아들에게서 겁에 질린 아이의 얼굴이 보일 때면 찌릿찌릿 젖이 도는 것처럼 느끼는 어머니를 빚어내고, 자신을 잊기 위해 학원 옥상 난간에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다 착지하지 못하는 작은 새처럼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여자친구 명희를 창조한다. 상상으로 직조해낸 그 가상의 팩트들이 해부해 보이는 것은 패륜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병리적 욕망과 상처들이다.

책은 '오랫동안 모욕당한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상처'('세이렌의 노래')를 실제 사건과 포개, 읽는 이의 마음에 그 상처를 감염시킨다. 타워팰리스 69층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해고된 공장 노동자의 아내는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건물의 흔들림을 홀로 느끼며 공장굴뚝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남편의 어지럼증을 함께 겪고('흔들의자'), 트로이의 목마 속에서 깨어난 오디세우스는 시공을 가로질러 용산참사의 현장을 낯선 시선으로 내려다본다('세이렌의 노래'). 이들은 모두 모욕으로 상처받은 사람들. 작가는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모욕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꿈과 기적 사이의 어떤 것이라면, 모욕은 절망과 죽음 사이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번 소설집이 실제 사건들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성의 언어로 지식인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가답게 그의 문학적 생애를 관통하는 주제어인 신과 인간, 역사와 폭력 같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테마들을 탐구한 소설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드는 생각. 작가와 리얼리즘의 친연성 여부와는 별개로, 자본이 권력을 넘어 종교가 돼 버린 이 시대, 어쩌면 소설은 다시 리얼리즘이어도 좋겠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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