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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 극한이라도…온전히 내힘으로 오르고 싶다

입력
2013.02.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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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 앞둔 산악인 김창호

“왜 산에 오르십니까?” 우문인 줄 알면서도 이 물음부터 꺼냈다. 평탄한 길을 비틀거리지 않고 걷기도 힘든 세상에, 극한의 위험 속으로 한사코 자신을 밀어 넣는 고산 등반가의 속내가 진짜 궁금했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20대 때부터 선배 산악인들 만나면 물었다가 바로 뒤통수 한대 맞곤 했죠. ‘야, 너는 왜 사냐’는 핀잔과 함께.(웃음) 조지 맬러리가 결국 죽음의 길이 된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나기 전 미국 강연에서 남긴 ‘그 산이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란 말이 우문현답이잖아요. 그냥 삶의 한 방식인 거죠. 거기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폭풍설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을 즐기면서, 삶이라는 한편의 시를 써 가는 거죠.”

올해 산악 인생 25년을 맞은 김창호(44)씨가 설산에 찍힌 발자국을 붓 삼아 써 온 대서사시의 한 장을 마무리할 장도에 오른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 이 도전에 성공하면 그는 아시아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 기록을 세우고, 최단 기간 14좌 완등 기록(예지 쿠쿠츠카, 7년 11개월 14일)도 경신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후배 4명과 함께 꾸린 원정대의 ‘From 0 to 8848’ 무동력ㆍ무산소 등정에 더 의미를 둔다. 통상 해발 2,800m 루크라까지 항공기로 가는데, 이번 원정대는 인도 벵골만 해발 0m부터 베이스캠프(5,360m)까지 카약(160㎞)과 자전거(1,000㎞), 도보(150㎞)로 이동한 뒤 무산소 등정에 나선다. 내달 11일 출발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로 바쁜 그를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난해 한국인이 히말라야 등반에 나선지 꼭 50년이 됐어요. 이번 원정이 새로운 반세기를 힘차게 여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14좌 완등의 마침표를 찍게 됐는데, 일부러 남겨 뒀나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애초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에요. 그랬다면 낭가파르바트(8,126m)와 가셔브룸1ㆍ2(8,068mㆍ8,035m) 3개 봉을 두 번씩 올랐겠어요? 에베레스트는 2007년에 도로공사팀이랑 갔는데 마지막 캠프까지 올랐다가 다른 한국 원정대 2명의 추락사고 소식을 듣고 수색작업을 돕기 위해 내려왔어요. 지원팀으로 간 거라 산소를 썼을 텐데, 그때 올랐으면 무산소 완등 기록은 없는 거죠. 후배들이 잘 나지도 못한 선배 기록 하나 만들어주는 건데, 그래서 고맙고, 더 미안하고 그래요.

-무산소 등정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평가야 남들이 해주는 거고, 개인적으론 어떤 산이든 온전히 내 힘으로 오르고 싶다는 거죠.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나섰을 때 다들 미치광이라고 했어요. 의사, 과학자들이 5분 만에 죽을 거다, 운 좋게 살아와도 뇌세포가 파괴돼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경고했죠. 그런데 해냈잖아요. 메스너의 말처럼 산소를 쓰면 8,000m급을 6,000m급으로 낮추는 거예요. 그러느니 욕심 버리고 6,000m 가라는 거죠. 물론 산소를 쓰고 안 쓰고는 개인의 선택이에요. 강요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죠. 등반은 4무(無)라고 해서 스포츠처럼 시공간의 제약도, 이건 반칙이다 하는 룰도, 지켜보는 심판도, 1등 2등 가리는 경쟁도 없어요. 심판이 없다 보니 등정 여부를 놓고 시비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어느 산을 어떻게 오를 지는 스스로 정하는 거죠. 그게 등반세계예요.

-산악인 가운데 무산소 등정으로 뇌가 손상돼 수술을 받은 경우도 있는데.

물론 위험이 따르죠. 스포츠에서 한계상황까지 밀어붙인다는 말을 쓰는데, 등반은 ‘극한’이란 말이 딱 맞아요. 7,500m 이상을 ‘죽음의 지대’라고 하잖아요. 산소가 부족해 소화가 안 되니까 계속 방귀만 나와요. 텐트에 앉아 있으면 진짜 웃겨요. 여기저기서 푹푹푹푹….(웃음) 고 박영석 대장 보고 다들 저렇게 배가 나왔는데 어떻게 산에 올라? 했잖아요. 그게 일부러 찌워 가는 거예요. 소화흡수가 안 되는 상황에선 자기 몸을 태워 그 에너지로 가야 하니까. 저기압도 문제여서 라면봉지가 부풀다 7,000m 넘어가면 빵 터져요. 뇌도 그렇게 붓는 거죠. 무산소는 쉽게 말해 7,000m대에서 열 걸음 걷고 호흡을 가다듬는다면, 8,000m대에선 한 걸음 걷고 열 번 헥헥헥 하고 또 한걸음 떼는 식이죠. 영하 30,40도의 찬 공기를 빨아들이니 기도는 다 상하고. 어쨌든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무산소로 가느냐 마느냐는 본인의 선택인 거예요. 다행히 K2(8,611m) 등정 때까진 문제가 없었는데, 200m 더 올라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저도 몰라요. 두렵지만 가보는 거죠.

-무산소 등반에 카약과 사이클, 트레킹까지 신종 철인 4종 경기라도 치르는 듯한데,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면 대개는 해발 0m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줄 알지 않나요? 그렇게 한번 해보자는 탕? 걸어서만 가려면 너무 오래 걸리고 지루하니까 사람 팔다리로 움직이는 도구의 힘을 빌리는 거죠.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에요. 90년 호주 사람이 해발 0m부터 베이스캠프까지 700㎞를 걸어가 무산소 등정을 했고, 95년엔 스웨덴인이 자기 집에서 네팔까지 자전거로 이동해 무산소 등정한 뒤 다시 자전거 타고 돌아가기도 했죠.

-여느 원정 때보다 준비에 어려움이 많겠어요.

안 하던 짓 하려니 흰머리가 자꾸 늘어요. 환장하겠어요.(웃음) 고산 등반은 책상에 앉아 연구하고 계획하는 과정이 90%를 차지해요. 암질에 따라 어떤 장비를 가져갈 지부터 칼국수를 먹을지 에너지바만 먹을 지까지 다 정해야 하고 날씨나 사고 등 각종 변수를 고려해 수만 가지 시나리오를 다 짠 뒤 가야 하니까 머리가 셀 수밖에요.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인데, 자전거 구간이 제일 문제예요.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운전을 워낙 거칠게 해 사고 위험이 상존하죠. 자전거가 차 한대 값이라 여유분을 가져갈 수도 없어 해체ㆍ수리 교육까지 받았어요. 13~17일 사전답사에서도 자전거 길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계획입니다.

김창호 대장과 전 구간을 함께할 서성호(34) 대원은 8,000m급 12좌(무산소 10좌)를 등정했는데, 이중 11좌를 김 대장과 같이 올랐다. 지난해 김 대장과 함께 네팔의 최고 미등정봉 힘중(7,140m)을 세계 최초로 올랐던 안치영(36) 대원, 서울대 농생대 산악회 출신으로 셰르파 알피니즘 연구를 위해 네팔에 머물고 있는 오영훈(35) 대원은 도보 구간부터 합류한다. 팀의 막내인 전푸르나(24) 대원은 현지 진행을 맡아 사이클 구간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뒤 생애 첫 히말라야 등반에 나선다. 김 대장과 전 대원은 서울시립대 산악부 20년 선후배 사이로, 시립대는 개교 100주년(2018년) 기념사업으로 이번 원정을 후원한다.

-전 대원은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전무한데, 에베레스트 도전은 무리 아닌가요?

푸르나는 산소를 써요. 어디까지 오를 건지는 스스로 정하라고 했어요. 네팔에선 여성대원을 아가씨를 뜻하는 ‘디디’라고 부르는데, 이 친구는 이름 자체가 힌두어로 여신이잖아요. 진짜 여신이 강림했으니 네팔 가면 완전 인기폭발일 거예요.(웃음) 등반은 기본이 잘 걷는 거라 하체가 좋아야 하는데 푸르나는 어릴 때부터 인라인 스케이팅을 꾸준히 해 하체가 좋아요. 여건만 좋으면 정상 등정도 기대해 볼 만하죠.

-정상에 오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사실 아무 느낌 없어요. 산소가 부족해 사고력이 10% 수준으로 떨어지니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여요. 여기가 진짜 정상 맞나 확인하고, 동남서북 차례로 풍경사진 찍고, 도와주신 분들 깃발 들고 증명사진 찍고, 다시 줌인으로 동남서북 파노라마 사진 찍고, 그게 20분쯤 걸려요. 그러고는 바로 내려가는 거죠. 저는 하산하기 전 담배 한 개비는 꼭 피웁니다. 파파팍 사진 찍을 땐 그냥 스쳤던 풍경이 그제야 눈에 하나하나 들어와요. 1년 동안 죽기 살기로 준비해서 이 산에 올랐는데, 내려가면 어디 또 갈까 그거 생각하는 거죠.(웃음)

-국내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꼽히는데, 등반철학이 있다면?

등반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인들은 무대에서 청중과 대화하고, 화가들은 캔버스에 자기 것을 쏟아내잖아요. 저희는 산이 무대고 캔버스죠. 이 거대한 자연에 자기만의 작품을 온 몸으로 쓰는 거죠. 그래서 등반가에겐 체력보다 창의성이 더 중요해요. 특히 저처럼 초등이나 신루트 좋아하는 사람에겐. 등반은 학문이기도 해요. 새로운 생각이란 게 끊임없이 자료를 찾고 연구해야 나오는 거잖아요. 제가 학과(무역학) 공부는 제쳐 놔 이번에 입학 25년 만에 겨우 졸업하지만 산 공부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웃음) 저희 집에 가면 등산복은 몇 벌 없어도 히말라야와 관련된 자료는 엄청 많아요. 100년, 200년 된 초판 원본도 많은데, 수집가들 사이에서 5,000만~1억원에 거래된다는 희귀본도 있어요. 원정 가면 헌책방 돌며 자료 사들이고, 집에 오면 그거 붙들고 씨름하고 그러고 삽니다.

-천생 등반가네요.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나요?

경북 예천 고향집에 드나들던 스님이 이 아이는 멀리 떠돌아다닐 팔자라며 액막이 한다고 아명도 지어주고 부적도 써주셨대요.(웃음) 대학 1학년 때 놀러나 다녀볼까 싶어 별 생각 없이 산악부에 들었다가 93년 파키스탄 그레이트 트랑고타워(6,284m) 완등으로 히말라야에 발을 들여놓게 됐죠. 정상에 딱 섰는데 등정의 기쁨보다 발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빙하에 마음을 뺏겼어요. 언젠가 저 구석구석을 다 누벼 보리라 다짐했죠. 97년부터 선배와 아웃도어용품 사업을 했는데 술만 마시면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히말라야 지도만 봐도 심장이 뛰고 도저히 잠이 안 와 한밤중에 소주 한 병 더 사 와서 지도에 코 박고 마시고….(웃음) 그러다 50, 60 돼서 가면 과연 재미있을까, 어차피 갈 거면 지금 당장 가자, 싶었죠. 수중에 1,000만원뿐인데 카메라 사고 비행기 티켓 끊고 나니 현지 가서 쓸 돈도 빠듯했어요. 그래서 준비하는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고 어쩌다 시내 나갈 때도 늘 걸어다녔죠. 나중에 산악 전문지에 탐사기를 연재했는데, 첫 줄을 이렇게 썼어요. ‘창 밖에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10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배낭을 꾸려 파키스탄으로 떠납니다.’

김 대장은 국내 최고의 히말라야 전문가로 통한다. 특히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도 인정 받는 탐험가다. 2000년부터 6년간 무려 1,800여일에 걸쳐 파키스탄 카라코람과 힌두쿠시 구석구석을 누비며 숱한 봉우리들과 깊은 계곡의 속살까지 카메라에 담았고 꼼꼼히 기록을 남겼다. 왜 하필 파키스탄이었을까.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던 거죠. 처음엔 저 혼자 좋아 간 거지만, 자료가 하나 둘 쌓이다 보니 파키스탄이 새 천 년의 뛰어난 등반가들이 뛰어 놀 플레이그라운드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팔 쪽에 비해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니까 제가 할 일도 더 많다 싶고 재미도 있었죠.”

탐사 성과는 거침없는 등반 행보로 이어졌다. 2001년 카체블랑사(5,560m) 세계 초등정, 혼보로피크(5,500m)와 시카리(5,928m) 신루트 개척, 2003년 딜리상사르를 비롯한 6,000m급 4개봉 단독 세계 초등정은 서막이었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중앙 직등루트를 1975년 메스너의 초등 이후 두 번째로 올랐고, 2008년엔 최고 미등정봉 바투라2(7,762m) 정상을 세계 최초로 밟았다. 14좌 완등 경쟁에서 한 발 떨어져 미답봉에 오르고 새 길을 내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추구하던 그가 2006년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꾸려진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에 합류한 것을 두고 혹자는 ‘당신도 피크 헌터(peak hunter)로 나섰냐, 배신 아니냐’고 따졌다. 그는 평가는 평자의 몫이라며 선을 그었다. “무슨 대단한 원칙을 지키겠다고 작정하고 살아온 건 아니에요.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산악인을 영웅처럼 그리는 것도 마땅치 않아요. 저도 겁 많고 나약한 인간이에요. 혼자서 몇 개월씩 탐사 다니다 보면 환각증상이 와서 카메라랑도 대화하고 텐트한테도 말을 걸어요. 탐사 마치고는 얘들아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워, 그러면서 다 벗고 같이 춤도 췄어요.(웃음)”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겪으셨지요.

탐사 도중 3인조 무장 강도를 만났을 땐 총알이 귓가를 핑~ 스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죠. 그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도 있는데 산에서 죽음을 맞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누라 들으면 큰 일 날 소리지만.(웃음) 제가 알던 국내 산악인 35명이 히말라야에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후배들한테 그래요. 산에서 죽은 사람들 문상 와서 울지 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다 떠났으니 행복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저도 울죠.

-지난해 결혼하셨죠? 예전 인터뷰에 보면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져야 할 책임감”에 대한 부담 탓에 결혼할 뜻이 없는 듯 말했는데, 갑자기 책임 질 자신이 생긴 건가요?

하하하. 아직도 책임은 못 져요. 저 신혼집 들어갈 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갔어요. 따로 옮긴 짐이라곤 한 방 가득한 히말라야 자료가 전부예요. 아내는 시립대 산악회 5년 후배예요. 그냥 형, 동생 하며 지내다 2008년 바투라2봉 다녀온 뒤 가까워졌죠. 프러포즈도 아내가 했어요. 딱 날짜까지 박아서 청첩장을 만들어 왔더라고요.(웃음) 조경설계 일을 하는데 등반 경험도 있고 승마 패러글라이딩 등 스포츠도 즐겨 서로 잘 맞고 이해를 잘 해주죠. 신혼여행도 보름간 네팔 히말라야 탐사로 대신했죠. 작년 힘중 등정 비용도 실은 아내가 마련해줬어요. 등반 내내 등짐처럼 떠메고 다녀야 하는 후원, 협찬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가고 싶어 손을 벌렸죠. (산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황금피켈상 아시아상 받을 때 수상소감에서 이걸 밝혔다가 선후배들한테 욕을 패대기로 먹었죠.(웃음)

-14좌 무산소 완등 이후 계획은?

히말라야 탐사 연구에 더 힘을 쏟으려고요. 저는 극한을 좇는 수직 여행(고산 등반)보다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수평 여행(탐사)에 더 마음이 가요. 10년, 20년 뒤 다리에 힘 빠지면 고산엔 못 오르겠지만, 히말라야 탐사는 평생을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죠. 한국 산악계를 더 풍성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종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이 워낙 장수 집안이라 언제까지 그렇게 떠돌아야 할지 걱정이에요.(웃음)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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