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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김현우 옮김·열화당 발행·231쪽·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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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김현우 옮김·열화당 발행·231쪽·1만2,000원

입력
2013.02.1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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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쩌다 이토록 하찮아졌을까.

TV에서는 변심한 연인에게 칼을 휘두른 사건 보도와 재벌가 상속남 쟁취 계략을 다룬 드라마, 어린 몸들이 섹스어필하는 춤을 추며 "너 없으면 죽겠다"고 소리 치는 무대가 이어진다. 현실이라고 다르지 않다. 연인의 애정도를 선물 값으로 측정하는 건 관습이 됐고, 평생 함께 하겠다는 혼인 서약은 계급 유지를 목표로 한 가족 제도 안에서 가족 이기주의로 변질되기도 한다.

이 모든 걸 사랑의 풍경이라고 뭉뚱그리는 세속의 무성의에 지칠 때마다 나는 하릴없이 이 책, 영국 작가 존 버거의 소설 를 편다. 나에게 사랑의 기원과 미래를 가르쳐준 한 쌍의 연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사람이 '가장 나종 지니인' 사랑의 아름다움과 힘을 회복하기 위해.

이야기는 폐쇄된 옛 교도소 터에서 발굴된다. 손 닿지 않게 높이 뚫린 작은 구멍으로 겨우 햇볕이 드는 2.5X3m, 높이 4m 감방에서 편지 뭉치가 나온다. 수신자는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이던 남성 사비에르다. 이중종신형이란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고, 사후에도 죽을 때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밖으로 내올 수 없는 형벌. 그런 그에게 연인 아이다가 보낸 편지들이 소설의 내용이다.

감옥 밖에서 다시는 연인을 안을 수 없는 운명을 견디고 있는 아이다의 농밀한 인내는 자주 나를 울게 한다.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영원한 것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옳아요." 하지만 그녀도 당장 연인의 아픈 발을 어루만질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목이 메곤 한다.

아이다가 홀로 오래 빚어낸 밀어들은 깊은 그리움이 지혜의 토양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희망과 기대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요.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죠.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죠. 그리고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사람들은 잡히지 않는 꿈과의 틈을 언어로 메우고, 거기에 기대 또 한 계절을 난다. 태초의 문법은 그렇게 쓰였다.

연인의 사랑이 한 차원 도약하는 건 이별을 낳은 사회적 상황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사비에르가 편지 뒤에 덧붙인 메모들은 그가 전복하려 했던 것들을 암시한다. "탈지역화, 단순히 노동력이 가장 싼 곳을 찾아 생산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리잡은 지역들을 파괴해 전 세계가 무의미한 곳, 즉 단 하나의 유동성 시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뜻한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좌파 정책을 인용한 메모들은 이 이야기의 지리를 초국적 거대기업과 추상화된 금융 시장을 내세운 미국식 자본주의에 저항해 온 남미 어딘가로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해법은 무력이 아니다. 사비에르는 저항의 진원지는 "가난한 자들의 저녁 대화"여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이웃과 함께 상처를 보듬고 아이들을 기르는 공동체의 일상이다.

아이다가 전하는 마을의 형편은 감옥 밖 세계의 고통과 희망의 축소판이다. 그녀는 마을을 수색하는 군인들과 두려워하는 이웃의 모습에 슬퍼하면서도 사랑의 힘으로 용기를 낸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다음부터, 미래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삶을 상상해봐요." 상대에 대한 애틋함을 주변에 대한 아량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넓히며 연인은 후대의 부모로 성장해 나간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은 얼마나 무한한가. 당신과 나, 사랑하는 사람이 손을 맞잡은 사이에 이토록 깊은 온기와 지혜가 있고, 그 품을 열어 다른 존재를 환대하는 데 사랑의 위대함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혁명일 수밖에 없다. 연인의 최후 대신 "신께서 이들을 지켜주소서"라는 기원으로 이야기를 끝맺은 저자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당신도 나처럼 두고두고 이 책을 다시 펴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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