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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으로

입력
2013.02.1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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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나온 기업 광고를 보니 자기들이 (경제발전을) 다 한 것처럼 말하더라."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 박정희 시대가 화제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경제를 이끌어 온 '재벌'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울산의 황량한 바닷가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 부총재를 만나 조선소 건설자금을 빌렸다는 몇 해 전 현대중공업 TV광고를 지목한 것이다. 그는 "정 회장이 대담한 아이디어로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을 결심한 박 대통령이 정 회장을 불러 조선소 건설을 독려했다"고 했다. 사실 세계를 제패한 우리 조선업의 시작은 박 대통령과 정 명예회장이 의기투합한데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휘하는 정 회장을 보며 "저 사람은 진짜 노가다"라며 조선소사업도 현대에 맡기라고 지시한 박 대통령과, "조선소도 결국 도크를 파서 용접을 붙이는 것 아닌가"라며 무한대의 자신감을 보인 정 명예회장의 합작품인 셈이다.

어디 조선업뿐인가. 오늘날 한국경제를 먹여 살리는 석유화학, 기계, 전자, 철강, 자동차 등 여러 산업은 박 대통령과 창업 1세대들이 '박ㆍ정 협력'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발전시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벌 체제의 출현도 근원을 따지면 1960년대 경제개발에 있지만 직접적 뿌리는 73년부터 조선 기계 전자 화학 철강 등 5대 부문을 중점 산업으로 지정한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있다. 이 과정에서 '유망주'집중 육성한 '아낌없는 밀어주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재계 2, 3세 오너들은 그들 기업을 키워준 아버지의 딸과 마주하게 됐다. 하지만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최근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총수들이 잇달아 실형을 선고 받은 데 이어 새 정권 출범 때마다 반복돼 온 사정기관의 칼바람이 다시 몰아칠 기세이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이미 검경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는 오너 리스트까지 나도는 등 흉흉한 분위기다.

재벌에 대한 박 당선인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공약대로 경제민주화는 확고히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은 지난달 "경제민주화를 통해 성장의 온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만들어 무너진 중산층을 복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방법이다. 사정의 칼날을 앞세워 재벌을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변화의 주체로 나서도록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박 당선인은 취임하면 산적한 국내외 경제 현안과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대외적으론 재부상을 노리는 일본과 더 강해지는 중국 사이에서 재벌들을 채근해 미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해야 한다. 향후 5년은 산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중국을 뿌리치고 일본과 다시 진검 승부를 펼쳐야 하는 시기다. 세계적 경기예측 전문가인 미국의 알렌 사이나이는 최근 "일본이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잃어버린 20년에서 탈출할 것 같다"며 "한국은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일본 재계가 기존 입장을 변경해 정부의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키로 하는 등 아베 정권의 경제회생정책에 화답하고 나선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박 당선인은 지난 10일 국민들께 드리는 새해 인사를 통해 "낡은 것들과 작별하겠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재벌이 스스로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게 하면서 새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게 할 수 있는 적임자다. 다시 말해 재벌에 대한 군기잡기식 사정 몰이나, 특정 목적의 표적 수사 등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나라의 중흥을 이뤘듯이 (자신은) 선진국을 만들겠다"면 재벌을 향해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적극적, 자발적 개혁 동참을 통해 아버지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박 당선인 뿐이다. 부친에게서 물려 받은 '채권'에 대한 권리 행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박진용 산업부 차장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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