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 살 때 누나를 잃었다.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두 여인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어린 뭉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뭉크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려서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5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한 남동생은 결혼 몇 달 만에 겨우 서른 살로 숨졌다. 아버지도 우울증 환자였다. 어려서부터 경험한 가족의 죽음과 이로 인한 공포, 어머니 사후 맞닥뜨리게 된 가난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5남매 중에서 오래 산 것은 뭉크와 여동생 하나뿐이었다. 허약체질로 태어나 잔병 치레가 잦았던 뭉크는 “나는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두 가지, 병약함과 정신병을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류머티즘 불면증 열병 등에 시달렸던 그의 작품이 질병과 광기, 죽음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0세 때 제작된 <절규>는 뭉크의 내면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대표작이다. S자 형태로 얼굴이 이지러진 채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다리 위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죽음과 공포에 질린 그 자신과 불안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검푸른 해안선도 아주 대조적이다. 뭉크는 이 소재에 애착이 컸는지 50종이 넘는 변형 작품을 남겼다. <절규>는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아울러 감동과 공감을 준다. 소리 지르고 싶은 게 많고, 절규하고 비명을 지르게 되는 사람들일수록 공감의 폭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르웨이관광청이 “무엇이 당신을 소리치게 하는가?”(What makes you scream?)라는 말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긴 비명’을 공모해 소리 지르고 싶은 욕구를 부채질하고 있다. 올해 뭉크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다. 전 세계 사람들의 외침을 이어 붙이는 ‘세상에서 가장 긴 비명 만들기’ 행사는 2월 28일까지 진행된다.
노르웨이관광청 웹사이트(www.VisitNorway.com)에 들어가 보니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의 비명, 대형 연어를 잡은 사람의 환호, 그네 타는 아기의 웃음, 살려달라는 절규, 멋진 경치를 본 사람들의 감탄 등 온갖 소리가 다 모여들고 있었다. 13일 현재 35분이 넘는 분량이다.
행사에 참가하려면 ‘절규’를 모티프로 제작된 영상을 본 뒤, 5초 내외의 외침 장면을 촬영해서 올리면 된다. 노르웨이관광청은 최종 우승자 5명에게 노르웨이 2인 관광권을 주고, 매주 월요일 ‘오늘의 비명’ 수상자를 선정해 아웃도어 용품을 제공하고 있다. 노르웨이를 공짜로 여행하려면 소리를 질러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어떤 소리를 내왔던가? 환호나 공포의 소리를 거침없이 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산에 올라가 “야호!” 소리치는 건 촌스러운 짓이고, 남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게 희노애락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며, 무엇이든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배우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무수한 소리가 귀를 스쳐갔지만, 어려서 들었던 소리 중 가장 이상한 것은 외가집에 갔을 때 들은 새 쫓는 소리였다. 그것은 “훠이, 훠어이!”도 아니고 “야, 이놈의 새들아! 저리 안 날아가?”도 아니었다.
외사촌 누나가 허수아비 세워진 누런 논에 내려앉은 참새떼를 “오~야!”라고 소리 질러 쫓을 때, 나는 그곳이 외국인 것 같았다. 정말 낯설고 이상한 소리였다.
진짜 낯설고 이상한 것은 노르웨이관광청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외국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만한 게 뭐 없을까?
그러나 진짜 진짜 낯설고 이상한 것은 바로 나라는 녀석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비명에 도전하세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신문에서 얼핏 보고는 제멋대로 비명(悲鳴)을 비명(碑銘)으로 받아들였다. ‘야아, 노르웨이관광청은 인문학적 소양이 대단하네. 이런 공모를 다 하다니...’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래서 묘비명에 관한 글을 쓰려고 유명한 묘비명을 찾아 읽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 흔히 “내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지.”로 알려진 번역이 잘못된 것임을 이참에 다시 지적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묘비명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은 “오래 살다보면 이런 일(죽음)이 있을 줄 알았지.” 정도의 뜻인데, 누군가 오역을 한 뒤부터 ‘우물쭈물 묘비명’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묘비명을 검색하다 보니 빌 게이츠 묘비명에 관한 만화도 보게 됐다. 그가 죽었을 때 뭐라고 쓸까? “컴퓨터의 황제 여기 잠들다”? “빌 게이츠, 컴퓨터 역사에 영원히 기억되리”? “모든 이를 편히 해주고 본인도 여기 잠들다.”? 아니 아니, 그 만화에서 가장 그럴 듯한 묘비명으로 거론된 것은 “빌 게이츠, 로그아웃하다.”였다.
각종 자료를 뒤지다 중학교 1학년 도덕교과서에 ‘묘비명 쓰기’가 있는 것도 알게 됐다. ‘이 도덕 교과서를 사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신문기사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아아, 그것은 비명(碑銘)이 아니라 비명(悲鳴)이었다! “애걔걔 이게 뭐야?” 하는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그 비명의 표기가 '애게게'가 아니라 '애걔걔'인 것도 비명거리였다. 한 이틀 착각이 올 라운드 플레이, 노 마크 단독 드리블을 했던 것이다. 이런 정도의 내 비명은 보내봤자 뽑히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Norway? No way!” 아니겠어?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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