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말 한국 현대문학 연구계에서 가장 중요한 학회라 할 수 있는 에서 펴낸 책 한 권이 화제라 한다. 이 안에 30~40대 젊은 인문학자들이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한 솔직한 자기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들은 사회적 중요성과 하는 일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대접'을 가장 못 받는 부류이다. 그들의 상황은 어느 40대 기혼 남성 연구자가 했다는 말로 요약된다. "끼니는 가깝고 희망은 멀다". 즉 눈앞의 경제적인 곤궁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들 삶의 질곡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젊은 인문학자들의 삶과 연구의 지속불가능성은 전국의 대학원 전반에 펴져 있는 사실이다. 학과를 막론하고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이 제대로 대학원답게 유지되는 학교는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오늘날 대학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비정규직 교수제도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눈 가리고 아웅'이거나 착취의 다른 이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2년 국정감사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전국 대학 초빙교수의 평균연봉은 2,767만원, 대우·객원·강의전담 교수 등 기타비전임 교원의 평균연봉은 1,829만원, 그리고 시간강사 평균연봉은 604만원에 불과하다(교수신문 2013년 1월 2일). 주요 대학 정규직 교수의 연봉 수준을 생각하면 정말 양극화는 절망적인 수준이다. 오늘날 한국 대학기업이 어떤 원리로 운영되고 있는지 이 '격차'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현재 보류 상태에 있는 고등교육법은 완전히 수정되어 새 법안이 작성되어야 한다.
한편 인문사회과학 대학원생과 박사후과정의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국가적 제도가 있다. BK·HK·SSK 등이다. 이 같은 지원제도는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이는 자본과 경쟁논리에 의해 유지되는 한국 고등교육 시스템의 보완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그늘도 꽤 깊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이 제도들은 지원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한다. 그 요구들은 때로 인문학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 지원제도 안에서 인문학자들은 성과주의의 노예가 되거나 의존성이 커지기 십상이다. 대학의 인문학이 점점 대중과 멀어지고, 깊이와 유용성을 두루 갖춘 인문학 서적이 좀체 나오지 않는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국가 지원 제도의 패러다임과 방식을 섬세하게 바꾸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중대한 과제이다.
인문학 연구자들의 삶과 연구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방책은 신자유주의 고등교육체제와 학벌체제를 폐기하고 넘어서는 것일 테다. 그러나 당장 그런 전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대안 없음'은 인문학 주체로부터도 주어진다. 그들 인문학자들은 모두 자본과 질서 앞에서 단독자들이다. '잉여'적인 약자들이다. 준-벌거벗은 삶이며, 착취와 불평등에 무기력하다. 이 무기력을 벌충하는 마음의 기제, 자위·자족의 기제는 매우 많다. 특히 자기가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막연하게 기대하지만, 그런 기대는 거의 충족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지식생산 제도와 마음의 체제를 스스로 바꾸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 해주겠거니, 정권이 바뀌면 나아지겠거니 하는 기대는 참으로 헛되다. 오래된 정규직 교수 조직이나 학회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소규모 연구자 공동체로도 유의미한 '대안'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하다. 수공업성과 자족성 때문이다.
국가의 지원이나 기성의 제도를 활용하면서도 거기에만 기대지 않는 방책이 스스로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상황에서 비정규직 교수나 대학원생들의 당사자 운동이 가능한 조건이 재검토되는 동시에 새로운 주체성이 구성되어야 하고 새로운 '당사자'가 출현하여 연대와 협력의 틀을 새로 짜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인문학자들의 삶 속에 개별성과 경쟁 논리를 우회하거나 극복하는 '공통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근래 사회적 공유 경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는데, 인문학자의 삶과 공부 안에 그 원리를 도입해야 할 필요도 있다. 정작 인문학자 스스로들을 위해 근본적인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