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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의 입담과 몸짓… 베를린의 가슴을 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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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의 입담과 몸짓… 베를린의 가슴을 적시다

입력
2013.02.1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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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오른쪽에 노란 주전자와 조그마한 탁상전등으로 장식된 낡은 책상이 놓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따라 무대에 오른 여배우(임문희)가 "당신만을 믿고 순정을 바쳐 사랑을 했건만…"이란 가사로 노래를 시작했다. 아코디언 반주에 맞춘 눈물 배인 연가였다. 남자배우(조휘)가 무대에 올라 한숨 섞인 또 다른 노래로 화답했고, 변사(조희봉)가 슬며시 무대 위 책상 앞에 자리해 전등을 켰다. 기다렸다는 듯 흑과 백의 조합으로 이뤄진 스크린이 열렸다. 변사는 능청스런 목소리로 "청춘! 푸를 청, 봄 춘… "이라며 입을 뗐다. 베를린 영화 팬들을 매혹시킨 공연 아닌 공연, 영화 아닌 영화는 그렇게 낯선 시작을 알렸다.

1934년 만들어진 한국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감독 안종화)가 10일 오후 4시(현시지각)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에서 공식 상영됐다. '청춘의 십자로'는 필름으로 남아 있는 국내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세계 3대 영화제(칸국제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처음 상영됐다. 베를린 칸트 거리 델피 필름 팔라스트를 찾은 700여 관객들은 79년 전 경성을 주유했던 청춘 남녀들의 최루성 짙은 사연을 타임머신 삼아 까마득한 시절의 이국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시간여행은 변사 조희봉(42)이 안내했다. 그는 사랑의 상처를 입고 무작정 상경한 영복과 그를 찾아나선 여동생 영옥, 악질 사채업자 개철 등 모든 등장인물의 입을 대신했고, 전지적 입장에서 이야기의 앞뒤 맥락을 전했다. 그는 때론 관객의 입장에서 주먹을 쥐어 흔들며 영화 속 악당의 패악에 몸서리쳤고, 청춘의 비가 앞에서 상련의 한숨을 내쉬었다. 관객들은 그를 매개로 흑백 화면 속 주인공들의 사연에 젖어 들며 때론 경쾌한 웃음으로, 때론 옅은 한탄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영복이 여동생과 재회하고 개철에게 복수한 뒤 사랑까지 차지하는 대목에서 변사가 한지부채를 쫙 펴며 "우리의 영웅을 위해 박수 보내주십시오~"라고 주문하자 관객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악극 같은 상영이 끝난 뒤 앙코르 요청과 박수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베를린시민 마쿠스 애커만씨는 "오래된 영화지만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이 아주 현대적이다. 한국식 해설자(변사)를 통해 정말 놀라운 경험을 했다"며 감탄했다.

이날 '청춘의 십자로'가 79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베를린을 찾기까지의 과정은 특별한 상영방식 못지않게 유별났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 영화는 단성사를 운영했던 고 오기윤씨 유족이 창고정리 중 발견한 정체 모를 네거티브 필름을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하며 '생존'을 알렸다. 영상자료원은 단 한 장 남아있던 '청춘의 십자로' 스틸을 실마리 삼아 영화의 정체를 밝혔고, '여고괴담2'와 '가족의 탄생'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에게 1930년대 상영방식을 감안한 영화의 부활을 의뢰했다. 김 감독은 5줄 정도 남은 줄거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복원했고, 작곡가 박천휘씨와 음악감독 변희석씨가 오래된 필름에 새로운 곡을 입혔다. 새로 탄생한 '청춘의 십자로'는 2008년 5월 첫 선을 보인 뒤 2009년 뉴욕국제영화제와 2011년 멕시코 과나후아토국제영화제 초청장을 받았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문화행사에 초대됐고 베를린영화제 레드카펫까지 밟게 됐다. 김태용 감독은 "영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공연(상영)을 할 때마다 새로 알게 된 내용을 더하고 곡도 새로 더 추가했다. 첫 공연 때보다 지금은 상당히 많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원래 모습에 가깝게 고쳐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일 (이하 현지시간) 개막한 베를린영화제엔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경쟁부문) 등 한국영화 장ㆍ단편 10편이 초청됐다. 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경쟁부문 황금곰상(대상) 등의 수상작과 수상자는 16일 오후 발표된다.

베를린=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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