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세개혁 좌표 설정한 이이, 공물 변통 이끌어낸 이원익반대파 반박하며 추진한 조익, 실질적 시행 완성한 김육역사는 단번에 바뀌는 것 아니라 실패 딛고 진화한다는 것 일깨워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조선시대 조세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대동법(大同法)을 바탕으로 4인의 경세가들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의 활약상을 다룬 평전으로 정치적 상황과 사건 전개뿐 아니라 인물 간 관계도를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대동법은 물품을 징수하는 공물 대신 쌀이나 무명을 내는 세금 징수 제도로 광해군(1608) 때 도입됐다. 이전까지는 관청에서 필요한 물건으로 부과하여 납부하도록 하는 공납의 폐해가 극심했는데, 빈민들이 부유한 관리들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형국에 까지 이르렀다. 백성들이 조세를 거부하고 유랑민이 되어 떠돌면서 국가 재정 또한 황폐화 되었다.
익히 알려진 사상가이자 가장 앞서 태어나 대동법의 효시를 만든 이이(1536~1584)부터 이원익(1547~1634), 조익(1579~1655), 김육(1580~1658)이 활동한 때는 중종부터 효종 때까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인조반정과 극심한 흉년, 전염병이 휩쓸었던 시기였다. 변변한 집 한 칸 없이 청렴한 벼슬아치로 살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대동법 시행에 힘썼던 이들의 고군분투는 오늘날의 정치가들에게도 일깨우는 바가 크다.
율곡 이이는 경세의 방법론을 전환하며 선조의 개혁 의지를 북돋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소 '만언봉사'를 선조에게 올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가 민생을 보장하는데 있다고 주장했지만 개혁은 실패였다. 이후 탄핵을 받고 49세의 나이에 사망해 당대에서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후 그의 경세론은 조선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이이를 탁월했지만 이해되지 못한 경세가로 칭하며 더 깊은 의미로 기려져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후 예비적 형태의 대동법인 공물 변통을 이끌어낸 이가 있었으니 오리 이원익이다. 그는 헌신을 다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모으는 관리의 자리에 있었는데도 백성들의 원망을 듣지 않았을 정도로 민심을 얻기도 했다. 그가 평양을 떠날 때 자발적으로 생사당을 세워 기리기까지 했다니 어떤 관리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원익은 충청·강원·전라도에 이르는 '삼도대동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포저 조익은 최초의 대동법 설계자로 실무적으로 추진한 이였다. '현실참여형' 지식인인 그는 바른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에 밀착한 개혁안을 제시했다. 광해군 5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조익은 그때부터 농민들의 현실을 살피며 짧은 기간 안에 여러권의 책을 썼으며, 인조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복귀해 유교 정전법에서 이념적 조세제도를 찾아 반대파들을 이론적으로 반박하고 왕에게 가감없이 상황을 전하며 대동법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공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비중 있게 다뤄졌지만 호서지방까지 확대 실시되는 실질적인 시행은 효종 2년(1651)에 이르러서였다. 저자는 조선 최고의 개혁을 이루며 대동법을 완성한 정치가로 잠곡 김육을 꼽으며 탁월한 정치가였음을 설파한다. 성균관 유생 시절 상소를 올린 일로 은신하며 직접 농사를 짓고 숯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한 그는 장원급제를 하면서 뒤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평생 정치적 목표에 '안민'을 두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 500년에서 그 처음과 끝을 제외한다면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험난한 시대였다'며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이이의 '만언봉사' 이후 49년 만에 김육이 왕에게 올린 상소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책은 역사는 단번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토대로 어느 순간 진화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