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 사태'의 장본인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이 2년 여 만에 입을 열었다. 그간 숱한 의혹에도 재판을 이유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지난달 16일 1심 재판에서 신한은행이 고소한 대부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은 뒤 한국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 전격 응했다.
신 전 사장은 작심한 듯 라응찬 전 신한지주 회장을 정조준했다. 그는 신한 사태의 본질을 "내부 알력다툼이 아니라, 라 전 회장이 조직 사유화를 위해 벌인 권력형 비리"라고 규정했다. 또 "정권 실세에게 전달된 돈은 있는데 정작 간 곳은 수사기관이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라며 "이른바 '남산 3억원'을 비롯해 라 전 회장과 MB정부 실세 간의 유착관계를 반드시 재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전 사장과의 인터뷰는 5일 오후 서울 시내 그의 사무실과 집 앞 카페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2010년 9월 신한 사태가 터진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재판 중에 내 의견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봤다. 지금도 확정 판결을 받은 건 아니지만 1심을 통해 어느 정도 의혹은 소명됐다고 생각한다. 40여 년 금융인으로 살면서 비난 받을 처신을 하지 않았다."
-세간에선 아직도 신한 사태의 내막을 궁금해 한다.
"2010년 신한은행이 나를 고소할 당시까지도 라 전 회장과 의를 상한 일은 전혀 없었다. 당시 라 회장은 2007년 차명계좌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50억원을 전달한 게 문제가 돼 회장직을 물러날 위기였다. 내가 그룹 내부에서 공공연히 2인자로 지목된 상황이라 어떻게 보면 내가 그 자리를 노려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라 전 회장이 따로 뒷주머니에 돈을 챙겼으리라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상사와 부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라 전 회장, 이백순 전 행장 측과의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는 얘긴가.
"권력 암투라…. 우선 이 전 행장은 나와 대적할 사람이 못 된다. 고 이희건 명예회장에게 신임도 얻지 못할 정도로 평판이 안 좋았다. 그저 신한이라는 매개체로 뭉친 동료였다. 난 그 때도 회장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라 전 회장은 달랐던 것 같다."
-라 전 회장은 뭐가 달랐나.
"조직을 사유화하려 했다. 그에겐 2인자가 필요 없었다. 나 말고도 많은 선배들이 그렇게 당하고 신한을 떠나갔다. 라 전 회장은 말 그대로 무소불위였다. 신한 사태를 권력형 금융비리로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라 전 회장은 영원한 소유를 꿈꿔 권력에 있는 사람을 이용했다. 실세에게 전달됐다는 3억원이 그 증거다."
-이상득 전 의원에게 전달됐다는 3억원 말인가.
"이백순 당시 지주 부사장은 직원들에게 라 전 회장의 지시라며 함구령을 내리고 3억원을 조성해 이 전 의원에게 전달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했다. 내 계좌를 이용했지만 당시 내 계좌는 돈을 조성한 박모 비서실장이 관리해 전혀 몰랐다. 한달 후쯤 박 실장으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았지만 더 묻지도, 알려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이 돈을 횡령한 것처럼 꾸며 고소한 것이다."
-당신은 진실을 모른다는 얘긴가.
"3억원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라 전 회장이 이런 식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전 의원뿐만 아니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MB정권 실세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이 전 의원이 아니라면 다른 이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이 높다. 남산 3억원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라 전 회장이 박연차에게 전달했다는 50억원도 불법자금으로 보나.
"라 전 회장은 50억원을 개인 돈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1991년 자신이 신한은행장에 취임할 때 이희건 명예회장과 일부 재일교포 주주들이 축하금으로 준 30억원을 이자 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셈이 밝았던 이희건 명예회장은 어느 누구도 승진했다고 축하금을 줄 사람이 아니다."
-그럼 50억원의 출처는 뭔가.
"현재 수백 조원 자산을 가진 신한은행이 1982년 자본금 250억원으로 설립됐다. 10년쯤 후지만 1991년 당시 30억원은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조사해보면 이 돈이 어떻게 조성된 건지 나올 것이다. 라 전 회장이 일본 주주 다수의 차명계좌를 관리해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지 않나. 그러나 사정기관은 이 부분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 등에서 다시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는 지 모르겠다."
-당신이 호남 출신이어서 제거당했다는 설도 있다.
"MB정권이 출범하고 지인들을 통해 '청와대 행정관들이 호남출신 지주 회장은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라 전 회장이 교묘하게 이를 이용했을 수도 있겠다. 금융권이야말로 고객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우선시 돼야 한다. 지역색에 얽매여선 안 된다."
-신한 사태가 이제 어느 정도 봉합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신한금융은 신한 사태 이후에도 변한 게 전혀 없다. 여전히 라 전 회장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동우 회장이 말한 탕평인사가 이런 건가. 소위 신상훈 인맥으로 분류된 사람뿐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바른 말(법정 진술)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직원이 한둘이 아니다. 한 회장은 왜 신한 사태를 재조사 해달라는 주주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있는 것인가. 제2의 신한 사태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 있지 않겠다는 의미는.
"과거 신한은 열심히 일한 사람은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는 은행이었다. 그러나 이젠 줄 서는 문화만 남아 있다. 그 뒤엔 라 전 회장과 심복들이 있다. 은행원의 생명은 정직이다. 내게 각종 의혹을 씌우며 고소했던 것처럼 이젠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진상조사도 펼쳐야 한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당한 직원들에 대한 복직 등 처우개선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신한이 라 전 회장의 손에서 벗어나 과거 부지런하고 신뢰받는 은행으로 재탄생하도록 일조하겠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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