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서 학부모들을 초청해 발표회를 할 때 아이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가 있다. 정수은 작사, 임수연 작곡 <다섯 글자 예쁜 말>이다. 2009년 서덕출 창작동요제를 통해 알려진 노래인데, 가사는 이렇다.
'한 손만으로도 세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말 정겨운 말/
한 손만으로도 세어 볼 수 있는/
다섯 글자 예쁜 말/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름다워요 노력할게요/
마음의 약속 꼭 지켜볼래요/
한 손만으로도 세어 볼 수 있는/
다섯 글자 예쁜 말.//'
대여섯 살 난 아이들이 율동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참 귀엽다. 지난주 외손자의 유치원 작은 음악회에 다녀온 한 할아버지는 무대 위에서 가장 씩씩하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아이를 보며 어느새 이렇게 컸나 하고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노래와 춤, 예절을 가르치고 사람을 만들어가는 유치원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절로 느끼게 됐다.
그런데 왜 다섯 글자일까? 노래에도 나오듯이 아이들의 작은 손 하나만으로도 셀 수 있는 게 다섯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굳이 석 자, 아니면 넉 자로 줄인 건배사를 만들어 함께 외치며 술을 마신다. 청소년들은 무슨 말이든 일단 두 자나 석 자로 줄여버린다. '김밥천국'이라는 음식점을 '김천'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어른들은 이 말을 경북 김천으로 알아들으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청소년들의 말은 기성세대에게 암호나 외계어와 다름없다. 한 손으로 셀 수 있는데도 다섯 글자가 길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어른들은 다섯 글자 예쁜 말을 얼마나 쓰고 있을까? 위에서 소개한 노래에 나오는 말에 뭘 더 추가할 수 있을까? 한번 꼽아보자.
다시 만나요(또 만나지요), 즐거웠어요, 언제든 와요, 살펴 가세요, 조심하세요, 건강하세요, 축하합니다, 오래 사세요, 행복하세요, 참 맛있네요, 참 잘했구나, 복 받으세요, 예쁘시네요, 고우시네요, 보기 좋네요, 멋지십니다, 자랑스럽다, 함께 웃어요, 함께 먹어요, 함께 갑시다, 걱정 마세요, 안심하세요, 잘될 겁니다, 충분합니다. 넉넉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제 탓입니다, 미안(죄송)합니다....
그런데, 부탁합니다. 잘 봐주세요, 한 번 봐줘요, 잘 넣으세요, 또 드릴게요, 도와주세요, 끌어주세요, 이런 것도 예쁜 말에 낄 수 있을까?
아니, 어린이들에게는 예쁜 말을 하라고 노래까지 지어 가르치면서 정작 어른들은 예쁜 말은 고사하고 다섯 글자 못된 말만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만 끊어요, 돌아가세요, 오지 마세요, 보기 싫어요, 그만두세요, 모르겠어요, 내 돈 갚아라, 겨우 이거냐?, 공부나 좀 해, 자빠져 자라, 너 죽고 싶니?, 잘났어 정말, 웃기고 있네, 싫다니까요, X놈의 새끼, 빌어먹을 놈, 바보 같은 놈, 우라질 녀석, 벼락맞을 놈, 나가 죽어라....
서덕출(1906~1940) 선생은 <눈꽃송이> <봄편지>를 쓴 울산 출신의 동시작가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나무에도 들판에도 동구 밖에도/골고루 나부끼네 아름다워라./',
'연못 가에 새로 핀/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다시 찾아옵니다.'
시는 작곡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노래로 다시 태어났지만, 지체장애가 심했던 그는 겨우 34세로 요절했다. 일제 강점기에 아름다운 말, 예쁜 말을 찾아 70여 편의 동시로 남긴 그가 그토록 그리던 봄이 입춘 지난 대지에 다시 찾아오고 있다. 다섯 글자 예쁜 말을 일깨워준 사람들, 그리고 다시 오는 봄, 고맙습니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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