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입사에 목을 매는 대학생들에게 문화와 사회를 이야기하고 인생을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오랜 운영난을 견디다 못해 2005년 문을 닫은 서울 신촌 대학가의 랜드마크 '독수리다방'이 과거 단골들의 애칭이던 '독다방'이란 간판을 달고 연세대 사거리 예전 그 자리에 지난 달 초 문을 열었다. 원 주인인 김정희(84)씨의 손자 손영득(32)씨가 사장이다. 손씨는 6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70, 80년대 독수리다방이 누렸던 젊은 소통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계승하고 싶었다"며 "저의 뜻에 할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흔쾌히 동조해주셨다"고 말했다.
71년 커피값 50원으로 문을 연 독다방은 청춘들의 만남ㆍ연애장소로, 문학적 감상과 시대적 고민을 나누는 토론의 공간으로 긴 세월 동안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인근의 드문 음악감상실이기도 했다. 독다방에서 DJ를 한 적도 있다는 손씨의 아버지 병문(59)씨는 "거의 매일 용산에 나가 한두 장씩 사 모은 LP판이 모두 3,000여장"이라며 "'The World Is A Ghetto' 같은 희귀 음반은 방송사에서 빌려 가기도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고 기형도 시인과 소설가 성석제씨, 배우 명계남씨, 프로야구선수 고 최동원씨와 농구인 최희암씨 등이 단골이었다.
원 주인 김씨는 "배고픈 학생들이 안쓰러워 매일 아침 찐빵을 쪄서 나눠줬는데, 나중엔 커피는 안 시키고 엽차와 빵으로만 배를 채우고 가는 단골들도 있었다"며 "장사가 웬만큼 돼서 그랬겠지만 가난한 학생들이 더 달라고 하면 무조건 퍼줬지"라며 웃었다. 그런 김씨에게 손자의 제안은 물론 고마웠겠지만 한편 안타깝기도 했을 것이다. 미국으로 유학 가 금융경제학을 전공하고 귀국 후 유명 투자자문회사에서 일하던 전도유망한 금융맨 손자가 갑자가 다방을 운영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손씨는 "4년 정도 일하다 문득 돌아보니 제 삶이 눈 앞의 이익만 좇고 있더군요. 연봉, 출세….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살고 싶었어요." 만류도 만만찮았다. 프랜차이즈 커피점으로 넘쳐나는 신촌에서, 다방이, 그것도 낡은 독다방의 가치가 통하겠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의 뜻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해준 것도 할머니 김씨였다고 한다.
270㎡가 조금 넘는 규모의 독다방은 오래된 도서관이나 서가의 응접실 분위기로 꾸며졌다. 군데군데 놓인 책장에는 같은 책들도 눈에 띈다. 안쪽으로는 스터디룸과 토론실도 마련됐다. 한 마디로 고급스럽고 세련된 공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손씨는 "독다방의 옛추억을 더듬어 오신 분들은 새로운 분위기에 실망하기도 하신다"며 "하지만 20대 취향과 눈높이에 맞춘 분위기와 고품질의 커피로 지금 세대의 명물 공간으로 만드는 게 제 꿈"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독다방의 영향력 있는 고문이다. 할머니 김씨가 " 학생 상대로 파는 커피는 무조건 싸야 돼. 2,500원만 받아"라고 하자, 사장 손씨는 "적자는 안 봐야죠. 커피 품질도 좋아야 하고…"라며 완강히 맞섰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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