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김윤식(1903~50)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등의 시로 유명한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이었다. 서정 시인이기도 했던 그가 바랐던 조국의 봄은 진작에 찾아왔지만, '인생의 봄'이나 마찬가지였던 학창 시절은 암울했다. 어린 나이에 참여했던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고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 그가 93년 만에 모교 졸업장을 받았다.
영랑의 모교인 서울 휘문고는 6일 오전 대치동 교정에서 김 시인의 막내딸 애란(69)씨에게 명예졸업장을 대신 수여했다.
사실 영랑에게 고3은 투쟁의 시기였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휘문의숙(현 휘문고) 3학년이던 시인은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고향인 전남 강진으로 떠났다. 강진 4ㆍ4 만세 운동 참여를 위해서였다. 경찰에 체포된 그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로인해 고교를 졸업할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영랑의 명예졸업장은 강진군이 추진하면서 빛을 보게됐다. 86년 영랑의 생가 터를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김윤식 시인 재조명 사업을 벌여 온 강진군은 최근 그의 생가에'시문학파 기념관'을 건립하고 사업에 힘을 쏟는 과정에서 휘문고에 명예졸업장을 추서했고, 학교 측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휘문고 관계자는 "늦은 감이 있지만 명예졸업장 추서를 계기로 영랑의 민족의식과 문학정신이 더욱 빛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앞서 휘문고 동문회는 지난달 21일 작고한 동문으로는 처음으로 김 시인에게 '자랑스러운 휘문인 상'을 줬다.
김애란씨는 "아버지 졸업장을 막내인 내가 90여년 만에 대신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감격해 했다. 김씨는"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중앙청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하실 때 퇴근 후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까칠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옛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영랑의 장손녀 김혜경(55ㆍ성악가)씨도 "당시 고교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조부께서 이제야 졸업장을 받게 돼 가슴이 뭉쿨하다"고 말했다.
이날 졸업식에 참석한 강진군 관계자는 "명예졸업장 추서를 형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시인의 애국사상과 문학사적 위상을 국민에게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