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지만 규명이 어려운 해악에 대한 사회적 대처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담배다. 1638년 영국 의사 토비아스 버너가 첫 학문적 보고를 낸 이래 치명적 부작용에 대한 고발이 수백 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가 담배의 해악을 공인하고 사회적 규제에 들어간 건 미국에서 가 채택된 1964년이다.
담배가 500년 간 사회적 규제를 용케 피해왔던 건 그 해악에 대한 규명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담배로 돈을 버는 자들의 탐욕이 적절한 사회적 대처를 방해했던 게 더 큰 요인이다. 17세기 유럽에서 담배의 해로움이 부각되지 못한 건 전매 수익을 노렸던 왕실의 타산 때문이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막강한 돈줄을 쥔 거대 담배회사들이 정치인과 관료를 매수했고, 어용학자를 동원해 실험결과를 왜곡했다. 돈벌이를 위한 탐욕과 기만이 명백한 해악을 수백 년간 방치한 주범이었던 셈이다.
탐욕과 기만으로 해악을 조장하는 파렴치는 오늘날 이 땅에서도 온라인게임 정책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그제 온라인게임의 해악으로부터 청소년을 건강하게 지킨다는 핵심정책을 포기했다. 심야 시간대 청소년의 온라인게임을 제한하는 '셧다운제'를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도 확대 적용하겠다는 당초 방침을 접고, 2015년까지는 현행 PC 셧다운제만 유지키로 타협해 버린 것이다. 셧다운제의 껍데기만 남긴 이번 결정에 게임업계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청소년을 겨냥한 모바일게임 시장을 무제한 열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중독된 청소년이 갈등 끝에 엄마를 살해하고 자살한 패륜이 빚어졌는가 하면, 게임비용 마련을 위한 살인강도 사건도 일어났다. 아동ㆍ청소년 인터넷중독률이 성인의 두 배가 넘는 14.3%에 이르고, 온라인게임 중독의 물리적 증상이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과 동일하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도 잇따랐다.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자 여가부가 셧다운제 강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기류는 지난달 8일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 등이 등을 발의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셧다운제를 강화하고, 게임중독유발지수를 측정하며, 게임업체로부터 중독치유기금을 징수한다는 내용이었다. 게임산업의 경제성을 인정하더라도 해악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반영했다.
하지만 업계는 온라인게임이 신성장동력이라는 점, 연 3조원대의 수출 효자산업이라는 점 등의 산업논리를 유포하며 반격에 나섰다. 심지어 게임산업전시회에 불참하겠다며 실력행사 의사까지 밝혔다. 이 와중에 문화부가 업계 편을 들고 나서면서 셧다운제는 순식간에 무력화하게 된 셈이다.
이 모든 난장(亂場)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념비는 아무래도 민주통합당 전병헌 의원의 셧다운제 전면 완화 법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e스포츠협회장을 맡은 전 의원은 여가부의 셧다운제 확대 포기 결정에 맞춰 그제 발의한 에서 셧다운제는 실효성이 없고 국내 게임산업에 대한 역차별일 뿐이라며 스마트폰 등엔 아예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했다. 셧다운제는 국제적 망신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셧다운제를 대신해 온라인게임의 유해성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할 아무런 대안도 그는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셧다운제 규제완화와 함께 진정 청소년들이 원하는 행복한 정책은 무엇인지 사회적 논의가 촉발되길 바란다"는 희한한 주장을 폈을 뿐이다.
셧다운제가 최선일 수는 없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으면 실효성을 높일 방안을 먼저 찾아봐야 한다. 나아가 당장은 대안이 없어 그나마 명목적인 제한이라도 두겠다는 안간힘이 청소년을 불행하게 한다면 대체 전 의원이 생각하는 청소년 행복을 위한 정책은 무엇인가. 여가부의 이번 셧다운제 포기 경위는 아무래도 우리 시대의 잠재적 해악에 편승하려는 기만과 탐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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