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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서울 송파구 정신여고 미술실. 이 학교 방과후학교 미술수업에 참여한 북한이탈주민 이형은(20ㆍ가명)씨는 교사의 말을 듣자마자 쓱쓱 그림을 그려 나갔다. 정장을 멋지게 차려 입은 남자를 그린 뒤 배경을 번개 모양으로 색칠해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냈다. 그림을 본 교사는 "창의적인 구성"이라고 칭찬했다. 방학임에도 수업에 참여했던 이씨는 "북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을 잊으려 미술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며 "완성도가 좀 떨어져 쑥스럽지만 내 그림이 전시된다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정신여고 본관 1층 로비에서는 조촐하지만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하늘꿈학교' 재학생 5명이 지난해 5월부터 매주 토요일 정신여고 방과후학교 미술수업에 참석해 직접 그리고 만든 작품 10점이 정신여고생들의 작품(17점)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이들을 지도했던 정신여고 신현영(29) 미술교사는 "북한에서 미술 정규수업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다고 하는 아이들이 9개월 사이에 줄곧 따라 그리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습작해 굉장히 놀랐다"고 했다.
북한이탈 학생들의 미술수업 참여는 지난해 3월 우연히 시작됐다. 임향자 하늘꿈학교 교장이 정신여고 간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일 이후 리더십'을 주제로 특강한 뒤 5월부터 매달 한 차례씩 양교생들이 요리실습 레크레이션 공연관람 등의 교류 프로그램을 만든 데서 비롯됐다. 평소 미술에 관심 있는 하늘꿈학교생 5명이 미술을 배우고 싶다고 해 뒤늦게 참여한 것이다. 하늘꿈학교에는 미술 전문교사가 없다.
이들은 쉬는 시간도 아끼면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심히 배웠다. 수채화 그릴 때 어려운 물감 농도 조절 등도 곧잘 할 정도로 재능과 소질을 보였다. 특히 이용현(14ㆍ가명)군은 캐릭터를 그리거나 직접 제작하는 솜씨가 탁월했고, 윤혜숙(17ㆍ가명)양은 연필로만 그리는 소묘에 심취했다. 신 교사는 "혜숙이는 집에서 그려오겠다며 '숙제'를 자청한 뒤 다음 수업 때 보여주기도 했다"며 "대학 입시에 밀린 미술을 도외시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었다"고 전했다. 수채화와 풍경화 등에 관심이 많은 강수정(19ㆍ가명)양은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다"며 "정신여고 친구들과 함께 산 등 야외로 나가 풍경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6일까지 계속된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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