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전교 1등'으로 통하던 정우(가명)는 중학교 3학년에 진학하는 지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골칫거리다. 수업시간에는 '그래, 어디 한번 떠들어 봐라'는 표정으로 늘 삐딱하게 앉아있거나 잡담을 해 선생님 속을 긁기 일쑤다. 숙제는 안 한다. 수행평가 과제도 제때 낸 적이 없다. 정우를 이렇게 만든 것은 초등학교 시절의 과도한 '학습 노동'이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수학 단과학원을 다니면서 중2 과정까지 떼고, 숙제 많기로 이름이 난 영어학원과 논술학원까지 다녔다. 성적도 좋았고, 잘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힘에 부쳤던 정우는 결국 6학년 때 공부를 손에서 놔버렸다. 기대했던 아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과는 갈등만 깊어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 한 중학교의 김모 교사는 "초등학교 때부터 심하게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이 중학교 올라와서는 확 지치면서 손도 못 댈 정도로 꺾이는 경우를 심심찮게 봐왔다"며 "이런 경우 인성까지 돌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5년 전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 재직 당시 담임을 맡았던 우재(가명ㆍ당시 1학년)가 그랬다. 입학 당시 이미 고 1 수학을 끝낸 우재는 1학기 내내 영재학교와 경시대회 시험을 준비하느라 새벽까지 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시험에서 번번이 좌절하면서 2학기부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엇나갔다. 결국 나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음주와 흡연을 일삼는 '문제아'가 됐다. 교수였던 부모는 이혼 직전까지 가는 등 가정도 파탄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 교사는 "우재처럼 심각한 경우가 한 학년에 3~4명 정도 있었다"며 "이처럼 심각하진 않아도 수업시간에는 딴짓하고, 쉬는 시간에는 학원 숙제를 하는 등 학교 생활이 엉망인 경우는 더 많다"고 말했다.
지나친 선행학습에 아이들이 병들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특목고 열풍이 불면서 초등학생까지 선행학습 과열에 사로잡혔다. 최근 특목고 인기는 주춤하고 있지만, 여전히 초등학교 6학년이 고1 수준의 '정석'을 공부할 정도로 선행 정도가 심하고 영어 사교육은 시작연령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2011년 전국의 고1 8,166명을 조사해보니 10명 중 8명(80.7%)이 중학교 때 고등학교 수학을 배웠다. 또 2011년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실시한 '우리나라 수학교육 현안 조사연구'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64.2%, 중학생 56.3%, 고등학생 62.9%가 1학기 이상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1년 이상 선행도 각각 26.0%, 17.5%, 20.9%나 됐다.
4세도 안 된 영유아도 영어를 배우는 상황이다. 경기 남양주시에 사는 이능영(30)씨는 지난해 4세였던 딸아이를 영어유치원(영어학원)에 보냈다. 이씨는 "11월생인 딸이 또래보다 느린 감이 있어 영어유치원을 끊고, 지금은 놀이를 통해 영어를 배우도록 어린이집을 보내고 있다"며 "주변에서도 4세 정도면 영어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육아교육정책연구소가 발표한 '유아 외국어 교육실태 연구'에 따르면 영어교육 시작 연령은 평균 3.7세다. 2010년 서울과 경기도의 초등학교 1,2학년 1,200명 중 영어교육을 시작한 연령은 3~4세(65.7%), 5세 이상(19.2%), 2세 이하(6.6%) 순이었다.
많은 이들이 선행학습의 폐해를 말하지만 학교시험과 대입 경쟁을 위해 안 할 수가 없다는 이들이 많다. 윤종희 배화여고 교사는 자신이 치렀던 1994년 수능과 2012년 수능 외국어영역의 어법 문제를 비교하면서 "수능을 보면서 문제가 어렵다고 느꼈는데 2012년 문제를 보면 어떻게 아이들이 저렇게 길고 어려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지 입이 딱 벌어졌다"고 말했다. 김혜남 문일고 교사도 "고교 영어의 경우 어휘와 제시문 등이 어려워져 순진하게 학교 진도에 맞춰 교과서만 공부해 온 학생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일부 학교는 1학년 시험문제의 70~80%를 3학년 EBS교재에서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모 교사는 "최상위권 학생들 중에는 선행학습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지만, 대부분 학생은 선행학습을 소화하지 못한 채 시간만 버리다 '학교 진도라도 열심히 할 걸'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안타까워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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