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은 사실상 신이다. 중국인은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신중국도 없었다'는 말을 달고 산다.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걸린 높이 6m, 너비 4.6m, 무게 1.5톤의 마오쩌둥 초상화와 맞은편 마오쩌둥기념당에는 매일 아침 그를 참배하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이들이 길게 줄을 선다. 이것도 모자라 1위안(약 170원)은 물론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100위안 짜리 화폐의 인물도 몽땅 마오쩌둥이다. 중국인은 단 하루도 마오쩌둥 없이 살 수 없다.
마오쩌둥은 영원히 중국인의 마음 속에 있다. 그럼 마오쩌둥의 큰아들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북한이다. 마오쩌둥의 큰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평안남도 회창군에서 미군의 폭격에 목숨을 잃고 북한에 묻혔다. 당시 28세였던 그는 결혼한 지 1년 밖에 안된 신혼이었으나 항미원조(抗美援朝)란 명분으로 참전, 한 달여 만에 참변을 당했다.
마오쩌둥은 큰아들의 전사 소식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대장정의 소용돌이 속에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못했던 마오쩌둥으로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당장 시신을 가져와 중국 땅에 묻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안잉의 시신은 중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묻혔다. 중국공산당 수뇌부는 당시 이 문제를 격렬하게 토론했다. 결론은 북한에 두자는 것이었다. 마오안잉에게만 특별 대우를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마오안잉의 시신을 가져오면 다른 전사자의 시신도 모두 송환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 사망자는 20만~9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중국이 마오안잉의 시신을 북한에 묻은 데엔 또 다른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로 마오안잉의 북한 안장을 통해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영원히 묶어 두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남한에 군대를 주둔시켜 거두는 효과를 중국은 북한에 마오쩌둥 아들의 시신을 둬 거두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없다면 중국은 미국과 직접 맞닥뜨려야 한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중국으로서는 완충지대로서 북한이 꼭 필요하다. 이것이 건국한 지 1년 밖에 안 된 신생국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 그들 표현대로 북한을 구하고 미국과의 한 판 승부를 벌인 이유다. 중국이 있는 한 북한은 망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게 한국전쟁의 또 다른 교훈인 셈이다.
최근 중국은 겉으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는 듯하다. 그러나 중국이 북한을 버릴 리는 만무하다. 제3차 핵실험을 한다 해도 중국은 북한을 결코 내치지 않을 것이다. 이미 1,2차 핵실험 후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각국의 냉정과 자제를 촉구할 것이다. 며칠 남지 않은 현 정부가 중국의 겉모습에 속아 초강도 제재만 추진하다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도 있다.
1953년 정전 이후 지난 60년간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와 협력을 약속하며 엘리제 조약을 체결한 지 올해로 50주년이다. 사실상 한국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도 이미 1979년에 수교했다. 동서로 갈라진 독일이 통일된 것도 23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냉전시대의 구도가 그대로다. 역사의 시계가 유독 한반도에서만 멈춰진 상태다. 이는 한반도가 다른 한쪽에 넘어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이 이 구도의 변화를 선호하지 않는 데서 그 근원적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에게도 피동적 역사를 거부하고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얼마나 힘썼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남북 모두 민족사적 측면에서 통일을 위해 노력하기 보단 오히려 각자의 정권을 더 공고히 하는 데 분단을 이용해 온 측면도 많았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올해로 60주년이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엔 이 멈춰진 시계가 가는 소릴 들을 수 있을까. 한반도의 꿈은 언제쯤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박일근 베이징 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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