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지역공예 살리기 작업은백제 수도였던 역사에 초점… 우선 전통공예 찾기부터 시작부여흙 문구·벽걸이 쟁반 제작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던데디자이너 엔조 마리와 협업미국식 상업디자인과는 다른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 배워지역주의 강조하는 이유는고유 문화와 자산 이용한 다양한 제품을 싸게 공급하면공예가는 물론 지역전체에 이득
전통공예 장인 가운데 최고의 경지인 인간문화재들이 만드는 가구나 공예품은 너무 비싸서 최상류층이나 즐긴다. 반면 생활 속에서 내려오는 전통공예품들은 헐값에 팔리거나 전승이 끊어진다. 양쪽 다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경우는 점점 드물어진다. 곱고 귀한 전통공예를 오늘에 되살려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 누구나 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그걸 만드는 장인들은 생활이 되고 마침내는 지역경제까지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6년부터 전통장인 후원사업을 해온 재단법인 예올(이사장 김영명)은 작년 3월부터 이런 지역공예 살리기에 들어갔다. 먼저 '부여, 지역문화 싹틔우기'라는 이름으로 전북 부여만의 독특한 공예품을 창조하는 일을 후원했다. 부여가 꼽힌 것은 젊은 전통문화 전문가를 키우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여기 있기 때문. 이 대학 최공호 교수가 총지휘하고 일본에서 공예로 지역 살리기를 성공시킨 디자이너 시로타니 코우세이(城谷耕生●45)씨가 아트디렉터를 맡았다. 10개월의 작업 끝에 지난 달 탄생한 벽걸이형 과반(쟁반), 토기문구, 그림 등의 공예품은 이달 중순까지 서울 가회동의 예올 사무실에서 전시된다. 특강을 위해 귀국한 시로타니씨를 만났다.
-지역 공예 살리기는 어떻게 하나.
"지역마다 다르다. 오이타현 벳푸에는 젊은 죽공예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라고 해서 죽공예만 연구했다. 죽공예가들에게 목공 도자 철공을 가르쳤다. 다른 분야를 알아야 응용력이 커진다. 옛날 사진 속의 물건을 되살리고 나이든 장인을 모셔서 기술을 배우게 했다. 무엇보다 생산기술을 디자인했다. 이곳은 온천지역이다. 대나무는 마무리가 어려운데 대나무를 구부려서 성형틀에 넣고 그대로 100도가 넘는 온천증기에 쪄서 고정이 된다면 굳이 복잡한 마무리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해보니 진짜로 됐다. 연료를 쓰지 않아도 되니 싼값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만든 조명등이 인기를 끌었다. 구부린 대나무 작대기로 아이들이 다양한 도형을 만들어 보는 텐타라는 교육완구도 만들었다. 지금은 주문을 다 대지 못할 정도로 죽공예품이 인기라서 새로 들어오는 공예가도 늘어난다 들었다. 후쿠오카의 고이시와라에서는 그동안 만들어온 도자기와는 다른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큐슈대 학생들과 함께 파스타 샐러드 디저트에 대한 인문 사회 역사 색채학까지 공부하면서 그릇은 이미 많은데 내가 만드는 것은 무엇이 남달라서 존재해야 하나를 고민한 끝에 여러 가지 요리를 한 그릇에 담아 여러 사람이 어울려 쓰는 그릇을 탄생시켰다. 카라츠에서는 지역특산물과 도자기를 연결시켰다. 카라츠의 자랑인 우엉 갓 겐코를 연구해서 제일 맛있는 특산물 요리를 어떤 그릇에 담으면 좋은지 연구했다. '카라츠의 흙으로 키운 야채를 카라츠의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먹는다'는 주제로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이게 계기가 되어 이듬해에는 특산물 채소와 도자기 판매를 엮은 지역축제 농도제(農陶祭)가 열렸다. 예산이 많지 않아 종이 포장상자를 쌓아 올리고 앞면을 잘라 상자 안에 LED조명을 넣고 그릇을 전시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이듬해에는 향토요리를 담는 그릇전을 열었다. 이탈리아 영사관에서 보고 이탈리아의 식재료와 카라츠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달라고 해서 에스프레소잔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 했다. 부여는 지역에 남아있는 전통공예도 없고 재료산지도 아니어서 지역공예를 찾는 작업부터 했다."
-내려오는 전통공예가 없는데도 전통공예를 살린다는 게 가능한가.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라 유물로 바탕은 충분히 있고 (전통문화학교) 젊은 학생들이 600명이나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기회라고 여겨졌다. 오늘날 유럽에서 전통문화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1870년부터 1910년 사이 산업혁명을 계기로 엘리트 계급이 국민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역사 속에서 찾아 뒤늦게 만든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나 킬트 천이 다 그렇다. 이걸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아테네도 가보면 고대의 유적은 많지만 중세 근대로 이어져 내려온 문화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아테네 하면 문화의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나. 부여도 부여의 새로운 전통을 지금 만들면 된다. 일본도 그렇지만 대학이 지역과 밀착한 경우가 별로 없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지역과 대학을 밀착시키고 공예가들이 어떻게 지역의 전통을 새롭게 창조하느냐를 고민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공예가들은 물건을 만들기는 해도 새로운 사고방식을 익히고 이디어를 짜내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는데 이번에 그걸 익혔다고 말하더라. 예쁘고 균형 잡히고 쓰기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 아름다운 물건을 찾고 있다.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되고 의미만 있어서도 안 된다. 두 개를 다 갖춘 디자인은 전통공예를 새롭게 전승하며 찾을 수 있다. 부여프로젝트는 부여의 젊은 공예가들이 그 방식을 찾는 방법을 배운 데에 의미가 있다."
-부여 흙을 찾아냈다던데.
"한국의 도예가들은 주로 중국 흙을 쓴다고 하더라. 지역성을 강조하는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젊은 공예가가 아주 살짝 '부여흙을 쓰면 어때요?'라고 제안한 것인데 내가 아주 좋다고 적극 밀어준 것뿐이다.(웃음) 부여흙으로 구우면 백제 전돌이나 기와에서 보이는 진회색이 나오는데 정제를 해서 문방구 용품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엔조 마리(81·디자이너)와 함께 활동했다 들었다.
"도쿄에서 대학(ICS예술대)을 졸업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일본은 미국식 상업주의 디자인에 젖어서 물건을 예쁘게 만들어서 많이 팔자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일에 회의가 들었다. 다른 나라를 경험해보자 싶어서 여러 나라를 두루 볼 수 있는 유럽, 유럽에서도 한 가운데에 있는 이탈리아로 갔다. 1991년이다. 처음에는 설치작업도 하고 밀라노공대에서 건축설계 도면을 그렸다. 한국도 일본도 미국식을 따라서 건축 인테리어 물건의 디자인이 다 분리되어 있지만 유럽은 디자이너가 주택부터 가구, 물건까지 다 설계한다. 더 놀라운 건 무엇이든 토론을 거쳐서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이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끊임없이 토론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교육도 그랬는데 중학교 졸업시험조차 교사와 학생이 토론식 문답을 했다. 아킬레 카스틸리오니(1918~2002) 엔조 마리 선생과 협업작업을 하면서 미국의 상업디자인과는 대조되는, 유럽의 사회적 디자인(social design)을 확연히 알게 됐다. 일본이나 미국은 물건을 만들 때 새롭다, 팔리겠다만 신경 쓰고 시장조사를 할 때도 상업성만 따진다. 그러나 유럽은 디자인으로 사회를 어떻게 좋게 바꿀까가 중요하다. '디자인은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기본이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디자인을 생각했다. 이 분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전한 직후 디자인사무실을 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도 더 편안하게 살고 좋은 물건을 쓰게 할 수 있느냐를 고민했다. 소비자의 권리만 고민한 게 아니라 노동자가 일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을 만들려고 했다. 대량생산을 하더라도 커피잔 손잡이나 그림으로 노동자들이 직접 하는 공정을 꼭 집어넣었다. 두 분과 일하면서 디자인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구나 싶어서 다시 디자인에 몰두하게 됐다.(96년 밀라노에 독립사무실을 연 그는 그 해에 밀라노 그랜드디자인상을 받았다. 엔조 마리와 공동작업한 것은 공동로열티를 받고 있다.)"
-그런데 왜 2002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나.
"유럽이 80~90년대 고도성장기를 겪으면서 미국식 대량생산이 주도하고 디자이너의 물건은 고급품이 되어 아무나 쉽게 쓸 수 없게 됐다. 전통공예에서 출발한 공예품도 부르주아만을 위한 고가물건이 되었다. 카스틸리오니 선생은 단순한 형태로 쓰기 쉽고 싸게 만든 조명기구로 유명했다. 그런데 10만원 이내로 만들어 팔 수 있는 걸 회사에서는 카스틸리오니 이름을 내세워서 30만원에 팔게 한다. 다자인 하는 사람이 아무리 철학이 있어도 시장에서 실현하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때까지도 수작업으로 만든 전통공예품을 일상용품으로 만들어서 싸게 팔고 공예가들이 생활도 하는 시스템이 살아있었다. 민주적인 디자인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이제 이탈리아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나가사키 운젠시)에 정착한 이유가 있나.
"일본에서 전통공예가 살아있는 지역이 큐슈와 작년에 지진이 난 토호쿠 지역이다. 큐슈는 아리타를 비롯해 도자기가 워낙 유명하다. 도쿄에 사무실을 연다고 해도 전통공예 일을 한다면 어차피 전국을 다녀야 하니까 이왕이면 큐슈에 속한 고향으로 가는 게 낫다 생각했다. 고향은 아버지가 10명 정도의 목공을 거느리고 작은 목공소를 운영한 곳이고 거기서 나도 고등학교 때부터 가구 도면을 그렸다. 매년 우리 스튜디오로 일본 전국과 이탈리아에서 300명 정도가 찾아 온다. 작년부터 나가사키 대학과 협력해 오래되고 버려진 빈집들을 리모델링해서 갤러리 카페 상점을 만들고 친환경적인 마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역주의를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나?
"디자인은 분기점에 와있다. 대량생산하고 대량소비하는 디자인 혹은 산업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잉여상품의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에다가 전세계가 자기 고유의 문화를 버리고 똑 같은 상품을 쓰는 문제가 있다. 지역의 자산을 살려서 저마다 모양은 다르지만 아름답고 질은 아주 좋은 물건을 비싸지 않게 쓰고 그걸로 지역의 공예가를 살게 한다면 그게 전체 지구적으로 봐서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대량생산의 흐름은 거세다.
"대량생산 공정에서도 실천할 게 있다. 일본에 와서 엔조 마리 선생에게 배운 걸 실천했다. 종전에 무인양품에서 만드는 상품은 전부 중국제였다. 그걸 일본제로 바꿨다. 중국에서 만드니까 일본 노동자들이 일거리가 없어진다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기가 만드는 물건을 살 수 없다면 노예와 같다. 의자의 플라스틱 등받이는 이탈리아에서 만들고 나무바닥은 일본에서 만들어서 판매장에서 조립하게 디자인 했더니 생산단가도 중국제만큼 낮아졌다."
-디자이너는 대접받고 물건을 만드는 공예가(장인)는 푸대접 받고 줄어드는 문제는 한국에서도 심각하다.
"일본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디자이너는 10분의 1만 남고 공예가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디자이너는 많고 공예가는 드문 세상은 마치 농부가 사라져서 농산물은 없는데 요리사는 많은 세상과 같다. 이것은 전통공예가들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찾는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그래서 전통공예를 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디자인하는능력을 키우게 하자는 작업이 바로 지역공예 살리기이다."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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