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전쟁의 최일선 이력서 "조금이라도 어필할 수 있다면…"취업시즌엔 하루 50여명 북적메이크업실·드레스룸 구비또렷한 눈매·갸름한 목선 등 포토샵 통해 '또 다른 나' 탄생치장넘어 변장·위장 수준까지
"속으로 화를 내세요"
'고개 살짝…, 네~, 웃으세요… 찰칵' 하는 여느 사진관과는 분위기부터 딴판이다. 165m²(50평) 공간 한 켠은 각종 화장품이 풀 세트로 갖춰진 메이크업실. 곁따라 미용실과 정장 20여 벌이 색상 별로 준비된 드레스룸이 있다. 촬영실 곁에는 대형 모니터와 태블릿PC가 놓인 리터칭(포토샵)실. 취업 전문 사진관이라는 서울 신촌의 S포토스튜디오. 입사 서류전형에 '먹히는' 사진을 '만들어'준다는 곳이다.
24일 오전 11시.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 취업을 준비중인 최수양(24)씨도 "그래서 찾아왔다"고 쭈뼛쭈뼛 말했다. 처음 안내 받아간 곳은 메이크업실. 30여 분 뒤. 사람이 달라져 나왔다. 면사포만 쓰면 예식 앞둔 신부라 해도 좋을 만큼 짙고 화려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승경(38)씨는 "플래시 빛이 강해서 웬만한 화장으로는 효과를 못 본다"고 말했다. 다음은 촬영실. 카메라 앞에 앉은 최씨를 향해 포토그래퍼 최동호(38)씨의 연출가를 방불케 하는 주문들이 쏟아진다. "턱을 당기고, 입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주문은 이거였다. "속으로 화를 내세요. 눈꼬리가 올라가야 해요. 눈에 힘을 좀 더 주고 눈빛으로 얘기하세요. 나를 뽑아달라, 뽑아달라~." 다음은 리터칭실. 그래픽디자이너는 27인치 모니터에 띄워놓은 사진을 최씨의 얼굴과 대조해가면서 영상 '수술'을 시작했다. "얼굴 붓기는 빼고, 목선은 갸름하게, 눈매를 또렷하게 하고, 부족한 속눈썹을 보충하면…, 자, 어떠세요?" 최씨가 사진을 받아 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 남짓. 최씨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에 살짝 반한 듯 들떠 있었다. "나 같지 않아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 할 수는 없잖아요."
3x4cm의 공간
매몰찬 명사형 단(短)문답의 공란들. 차가운 숫자와 팩트(fact)들의 자리 어디에도 사연이나 수사(修辭)가 끼어들 틈은 없다. 압축과 효율의 서식 미학이 극한으로 구현된 그 A4 한 장의 이름이 이력서(履歷書)다. 50개 남짓 되는 빈 칸 안에 스무 해 남짓의 삶 전부를, 신상과 취향과 가족관계와 학력과 경력과 능력을 욱여 넣어야 한다. 그것으로 심판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력서는, 취업 서류전형에서 몇 번 좌절을 경험해본 이에겐 어쩔 수 없이 야속하고 두렵기까지 한 양식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몇 번을 뜯어보고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고쳐 쓸 오답도, 더 채워야 할 빈 칸도 없다. 그런 이들이 마지막 혼신의 힘과 정성으로 채우는 칸이 있다. 바로, 이력서 우측 상단의 3x4cm의 공간, 반명함판 증명사진이 붙는 자리다. 취업전문 사진관은 그 자리를 채우는 곳이다.
"올인원에 30만원"
취업전문 사진관은 서울 신촌에만 어림잡아 스무 곳 있고, 홍익대 인근과 강남의 압구정동에도 십여 곳이 성업 중이다.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 사진 보정의 '올인원'서비스를 받는데 드는 비용은 20만~30만원 선. 유명 헤어샵에서 머리를 만지고 별도 메이크업샵에서 수십만 원짜리 화장을 하고 사진을 찍으러 오는 이들도 있다고, 거기 비하면 저 비용은 저렴한 편이라고 했다. 취업 재수생 최현주(가명ㆍ26)씨는 상위권 대학을 나왔고 토익 점수도 고득점이라 할 만하고 해외 봉사 '스펙'까지 챙겼는데도 지난해 취업에 실패했다고 했다. 혹시 사진 때문인가 싶어 다시 찍으러 왔다는 그는 "지금까지 증명사진 촬영 비용만 40만원 넘게 썼다"고 말했다. 최씨처럼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그 스튜디오를 찾아오는 이들이 요즘 하루에만도 줄잡아 50여 명. 강원 제주 부산 등지서 첫차 타고 오는 이도 있고, 예약을 안 하고 와서 서너 시간씩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국내외 항공사들의 승무원 채용 원서접수가 지난 주말로 끝났다. 본격적인 취업 시장이 열리는 2월 말까지 한 달 남짓은 극성수기는 아니다. 스튜디오 관계자는 "대기업 채용공고를 전후해서는 인터넷 예약하고도 대기해야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앞트임 좀 해주시면…"
취업 준비생인 권가희(가명ㆍ24)씨는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였다. 이미 근처 메이크업샵에서 화장과 머리를 하고 왔다고 했다. 권씨는 모니터의 사진을 보며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말했다. "턱이 너무 짧지 않아요? 조금만 더 늘려주세요" "눈도 좀 답답해요. 앞트임(미간을 틔워 눈을 크게 보이게 하는 기법) 좀 해 주시면 어때요?" 외모가 취업의 중요한 요소가 된 현실에 대해 권씨는 "어쩔 수 없죠 뭐. 취업 때문에 성형수술하고 어학연수 다녀오는 이들도 지천인데, 이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를 罐?彭타?? 그래도 해볼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해봐야 한다는 절박함이 거기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취업 준비생은 1년 전보다 9.8% 늘어난 58만2,000명. 15~29세의 (준)실업자는 120만명에 이른다. 대기업의 연간 신규 채용은 2만명 안팎이다.
증명사진이 아닌 '표현사진'
19세기 초 사진이 등장하면서 그림은 추상으로 비껴 섰다. 귀족들의 인물화로 밥을 벌던 이들은 빛이 포착해내는 1/500초의 구김살 없는 사실(寫實)에 구상만으로 대적할 엄두를 못 내겠던 것이다. 이제 화가들은 관찰을 넘어 해석해야 했고, 묘사의 기술이 아니라 개성의 기법을 고안하는 데 더 골몰해야 했다. 그래서 '그림은 번역이고 사진은 인용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예술 사진도 아니고 증명사진이, 현실이 아닌 이상을, 사실이 아닌 꿈을 지향하는 시대가 됐다. 나의 얼굴을 찍되,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설사 그 결과가 나를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일단 서류전형만큼은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면접에서 좀 난처해질지언정 이력서의 나가 아닌 진짜 나를 보여주고 어필할 수 있는 기회라도 얻어야겠기에, 그래서도 안 되면 수긍할 수 있겠고, 적어도 할 만큼 했노라 자위라도 할 수 있겠기에.
사진의 자리가 추구하는 바는 물론 다양하고, 디지털화와 함께 포토샵도 대중화ㆍ보편화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력서 증명사진이 특별해 보이는 까닭은, 차가운 경험과 이력의 사실 공간 안에 자리잡은 유일한 미학적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 자리는 뽑히려는 자로서의 나의 얼굴을 뽑는 자에게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뽑히고 싶다는 나의 갈망과 열정을 뽑는 자에게 최대한 곡진하게 '표현'하는 자리다. 그래서 턱선을 깎기도 하고, 쌍꺼풀을 그려 넣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앞트임도 해야 한다. 그러다 도가 지나쳐, 치장을 넘어 변장으로, 더 나가 위장ㆍ위조 수준으로까지 치달을 때도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사문서 위조다. 그래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까닭은 워낙 그런 사례가 일상화한 탓도 있겠지만, 앞서, 뽑히려는 자들의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을 뽑는 자들이 이해하고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표현'의 수위와 효과는 별개로 치더라도.
"호감 주기 위한 노력 OK 지나치면 되레 불이익"기업 인사부장 시각은
"기업 입장에서 이력서는 지원자와의 첫 만남입니다. 호감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있죠."
29일 종로에서 만난 한 대기업 인사부장은 이력서 사진에 대해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그는 "소개팅에서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가 호감을 주듯이 사진이 좋은 인상을 준다면 이력서를 더 꼼꼼히 읽게 된다"고 했다. 이어 "20년 전만해도 양복을 입지 않고 취업용 증명 사진을 찍었지만 지금은 양복을 입지 않으면 성의 없어 보인다"라며 " 단정한 외모, 웃는 인상, 흰색 블라우스에 정장 차림 등 트렌드가 있는데 그 트렌드가 획일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취업을 위해 노력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하지만 지나치게 포토샵을 한 사진은 면접에서 되레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사진을 보고 기대했는데 면접에서 만난 실제 외모가 너무 달라 놀란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밝은 미소가 자연스러운 표정 속에 잘 어우러진 사진들이 인상에 남더군요. 하지만 어색한 미소로 작위적인 인상을 주거나 사진에 너무 손을 봐서 성형수술 수준이 된다면 회사를 속이는 것처럼 느껴져 좋게 보이지 않아요."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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