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1,000만 달러짜리 짐바브웨 지폐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가짜 돈 같기도 해서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책상 정리를 하면서 버렸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복돈으로 받은 것인데, 알고 보니 그 돈이 진짜 짐바브웨에서 통용되는 것이었다. 요즘엔 100조 달러짜리 짐바브웨 지폐가 설 선물용으로 인기라고 한다. SK플래닛 오픈마켓 11번가 등에서 판매하고 가격은 4,500원 정도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자녀의 경제감각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선물 5가지 중 하나로 이 100조 달러짜리 짐바브웨 지폐를 꼽았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1.3일 단위로 두 배씩 뛰자 짐바브웨의 중앙은행은 2009년 2월 조 단위 지폐 4종(10조ㆍ20조ㆍ50조ㆍ100조)을 발행한 뒤 이를 다시 리디노미네이션 하는 등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미국의 달러를 자국 통화로 결정했다. 짐바브웨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박스로 옮겨야 했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다.
대학 교수이자 작가인 빌 포셋의 에 따르면 인플레이션과 화폐가치의 하락은 국가 쇠망의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바이마르 정부는 돈을 마구 찍어내다 실각했다. 빵 한 조각을 사려면 수레로 하나 가득 돈을 싣고 가야 할 정도였다. 이 틈을 타 나치가 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집권했고, 세계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는 대리석으로 도시를 재건하고 그만의 궁전을 짓기 위해 은화를 마구 찍어냈다. 은이 부족해지자 동전의 은 함류량을 낮췄고 다른 황제들도 이 방식을 따랐다. 이를 '화폐의 타락(debasing the currency)'이라고 했다. 결국 은화의 은 함유량은 1%도 되지 않았고,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면서 로마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청나라도 유사한 방법으로 돈의 가치를 하락시키다 최후를 맞이했다.
2008년 이후 미국과 유럽이 연이어 금융위기를 맞이하면서 세계 자본시장에 천문학적인 돈이 풀리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통화를 시중에 공급해 신용경색을 해소하고 경기를 부양시키는 양적 완화 정책을 앞다퉈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익정권이 들어선 일본까지 가세하면서 주요국들이 통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이 뿌린 돈이 5조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자국통화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인플레이션 목표율까지 공공연하게 제시하면서 경기부양에 나서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중국 EU 등도 아연 긴장하고 있다. 엔화가치가 하락하는 만큼 경쟁국들의 수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화폐가치를 인위적으로 하락시키는 경쟁을 벌이는 것은 과거 로마제국이나 청나라, 바이마르공화국 등의 경우처럼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우리처럼 경제규모는 작은데 외환시장 개방수준이 높은 국가들은 이 같은 양적완화의 피해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많은 자금이 갑작스럽게 유입되어도 문제지만, 그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더욱 위험하기 때문에 토빈세 도입 등의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금융 파생상품과 리스크 관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사트 야지트 다스는 에서 이 같은 '보톡스(botox) 경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세계중앙은행이 엄청난 양의 금융 보톡스를 주입했지만, 이는 깊이 뿌리 박힌 문제들을 더욱 은폐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넘쳐나는 강물처럼) 시중의 과잉 통화도 어딘가로 흡수되지 않으면 범람하여 큰 재앙을 일으키고, 화폐는 결국 가치절하의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중국의 유명 경제 예측가인 스한빙의 지적에 공감을 보낸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