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참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일 잘 해놓고도 제작사에게 돈 달라고 사정하는 게 정상입니까?" 연기생활 10여 년째인 배우 A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힘 빠진 목소리로 넋두리하듯 속내를 털어놨다.
단역 배우인 A씨가 외주제작사와 배우를 연결해주는 브로커 '캐스팅 디렉터'에게 수수료로 30%를 떼주고 한 회 출연료로 받는 금액은 15만원선. 하루 일당으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두 달에 한 번 꼴로 출연 기회가 생기는 형편이니 잘 벌어야 한 해 출연료 수입은 200만~300만원에 불과하다. 그는 "동료들 대부분 비슷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건강ㆍ고용ㆍ산재보험, 국민연금 등 4대 보험도 적용 받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배우로 살기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출연료로 생계 유지가 어려울 정도면 10여 년 배우생활에 자괴감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화내거나 자책하거나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닌, 현재 배우로서 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출연료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된다. 근데, 미치도록 하고 싶다"고도 했다.
문제는 쥐꼬리만한 출연료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외주제작사의 횡포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인데 몇 달째 안 주는 겁니다. 외주제작사 대표에게 '이름도 알려진 분이 얼마 안 되는 출연료를 떼먹으면 안 된다'고 편지를 썼죠. 그나마 형편이 좋지 않다고 절반 뚝 떼고 주더군요.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지난해에는 얼마 안 되는 대사를 밤새 연습하고 의상까지 새로 샀는데 촬영 당일 아침 '올 필요 없다'는 문자를 받았다. 제작사나 방송사 고위층이 자신의 배역에 낙하산 배우를 끼워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헛웃음만 나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강렬한 눈빛을 만드는 일뿐이었다. "눈빛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남루한 제 옷차림에 눈길을 주지 못하게 하는 것,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그런 눈빛을 만드는 게 돈 없고 빽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죠."
'배우야 본디 배고픈 직업이니 돈 없으면 굶고, 또 돈 생기면 주위사람에게 인심도 쓰면서 사는 것이지'라고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릿하다. 촬영할 때를 제외하면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초등학생 딸에게 고기 한 번 마음 편히 사주지 못하고, 아내 생일에 선물도 제대로 해주지 못할 때 특히 그렇다.
생계를 온전히 아내에게 맡긴 채 자신의 꿈만 좇아 살아온 인생이 후회돼 몇 년 전에는 직장을 갖기도 했었다. 화장품을 파는 일이었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수입이 중단되는 바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정적인 일에 도전해 실패하면서 제가 가장 잘,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배우뿐이라는 것을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성공하는 게 가장 큰 복수라는 생각으로 몸을 만들고, 거울을 보며 대사를 연습한다. 또 딸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딸아, 네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 네가 그 배우의 딸이라며'라는 말을 듣게 해줄게."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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