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는 줄잡아 3,000여명.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에 따르면 한 해 1,000만원도 벌지 못하는 배우가 전체의 70%에 달한다. 그나마 열심히 한 만큼이라도 받으면 다행이다. 출연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출연 소득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대다수 연기자들이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현재 지급되지 않은 출연료는 18억원을 넘는다.
출연료 미지급 사태의 원인은 외주제작 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프로그램 등의 편성에 관한 고시'에 따라 외주제작 편성 비율은 전체 방송시간의 40% 이상(KBS 2TV 기준)이 돼야 한다. 뉴스, 다큐멘터리 등은 방송사에서 자체 제작하기 때문에 드라마의 경우 거의 대부분 외주제작사에게 맡기는 실정이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외주제작사들의 덤핑 계약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방송영상독립제작사는 1,231개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이 가운데 실제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업체 수를 200곳 정도로 추정한다. 한 주에 지상파에서 방송하는 드라마가 20여편에 불과하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방송사들은 더 싼 가격에 계약을 하려고 하고, 외주제작사는 원가의 절반에 불과한 금액이라도 일단 계약을 맺고 보는 식이다. 간접광고(PPL)와 해외 판권 수입으로 부족한 금액을 충당하려고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가장 약자인 배우들의 출연료를 떼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싼 가격만으로 승부를 걸 수는 없는 일. 외주제작사들은 방송사의 선택을 받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스타 배우와 작가를 섭외하고 그럴 듯한 기획안을 만들어낸다. 제작 능력과 경험이 일천하고 경영 상태가 부실해도 포장만 잘 하면 계약을 따낼 수 있는 셈이다. 이게 두 번째 문제점이다. 실제로 2010년 KBS '프레지던트'를 제작했던 신생업체 필름이지는 최수종 하희라 부부를 캐스팅하면서 화제를 모았지만 드라마 종영 직후 도산해 아직도 5억4,000만원에 달하는 출연료가 밀려 있다. '프레지던트' 직전 방송했던 '도망자'의 제작사 '도망자 에스원'도 이름 그대로 '먹튀(먹고 도망감) 행각'을 벌였다.
이들 제작사는 모두 KBS 출신이 만든 회사여서 전관예우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필름이지 대표는 KBS 행정직 출신 김모씨, 회장은 KBS 드라마국장 출신 류모씨이고, 도망자 에스원 대표는 KBS FD였던 노모씨이다. 한연노는 외주사 선정 기준과 원칙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방송사들은 고유 권한이라며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무늬만 외주제작인 풍토도 외주제작사들의 경영 악화를 초래, 출연료 미지급 사태를 낳는다. 현행 제도 상 외주제작 방송프로그램으로 인정 받으려면 외주제작사가 ▦작가와 계약 ▦주요 출연자와 계약 ▦제작비의 30% 이상 조달 등 5가지 항목 중 3개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문제는 주요 스태프와의 계약체결 여부인데, 보통 방송사들은 촬영과 편집은 외주제작사에 맡겨도 연출은 넘기지 않는다. 제작을 지휘하는 연출자가 비용이 많이 드는 야외촬영을 강행하거나 출연자를 더 많이 요구하면 외주제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다. 한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작가 주연배우 캐스팅 외에 제작에 대한 전권을 방송사가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출연료를 떼일 것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효성이 낮다. 방송사들은 외주제작사에 5억원 상당의 보증보험을 들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외주제작사가 도산하면 작가, 스태프, 기타 제작비도 지급해야 해서 배우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거의 없다.
문제갑 한연노 정책위원회 의장은 "출연료 미지급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송사들이 외주제작사 선정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주제작사를 선정할 때 기획과 주연배우 섭외 능력 못지 않게 제작 경험과 자본 조달능력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 의장은 아울러 "방송사가 배우들에게 직접 출연료를 지급하는 풍토도 정착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방송사가 세트를 만드는 자회사 보호 차원에서 외주제작사를 거치지 않는 것처럼 출연료도 직접 지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한국방송협회 민영동 대외협력부장은 "제작 경험을 단서로 달면 신생회사들에게 진입 장벽이 될 수 있고, 출연료를 직접 지급하면 외주제작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 등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면서 "그래도 출연료 미지급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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