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근대적 감수성 천착"외국詩 대충 번역에 열 받아 시작" 12명 주요 시인 시전집 번역 목표셰이머스 히니 이후 두 번째 작업 "기존 언어 문법과 끊임없이 싸워"
"대체로 모든 일을 열 받아서 시작해요. 이번에도 처음엔 이 시인의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어서 시작했죠."
시, 소설, 문학비평 등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저작을 출간한 김정환(59) 시인이 이번에는 시전집 번역에 나섰다. 영국 시인 번역으로 2011년 12월 1,150쪽 분량의 을 번역 출간한데 이어 1년여 만에 다시 300여 쪽 분량의 시집을 선보인다. 29일 만난 김씨는 "20세기 근대적 감수성을 시로 재구성하겠다는 목표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변형이라는 평을 받다가 사후에는 '무르익은 모던'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표현 기법에서 앞섰지만 잘 읽히기 때문에 영국에서 굉장히 대중적인 시로 애송되죠. T.S. 엘리엇 이후 가장 중요한 영국 시인입니다."
필립 라킨은 평범한 소재와 일상어를 통해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동시에 영국 모더니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모더니즘 문학이 범람하던 1940년대 흐름에 반하는 시를 써서 대화체, 때로 통속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2008년 타임스가 실시한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전후 작가'에 조지 오웰을 누르고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평생 독신으로 도서관 사서로 살며 단 4권의 시집만을 냈다. 죽기 1년 전 영국왕실이 영국의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는 계관시인 자리를 제의했지만, 귀찮다고 거절한 괴짜다. 하지만 시는 이토록 아름답다.
'사랑의 어려운 부분은/ 충분히 이기적이기,/ 눈먼 고집 부려/ 하나의 존재를 속상하게 만들기,/ 그냥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지./ 어떤 뺨을 그것이 취해야 하는지.' ('사랑' 부분)
김씨는 필립라킨 외에도 앞으로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폴란드), 콘스탄티노스 페트루 카바피(그리스), 세사르 바예호(스페인), 안나 아흐마토바(러시아) 등 우리에게 온전하게 소개되지 못했던 세계 주요 시인 12명의 시전집을 번역해 선보일 계획이다. 이 시리즈를 구상한 건 2009년. 툭하면 (오래된 시풍인) '소월시풍'으로 번역하고, 좀 어렵다 싶으면 그냥 빼버리고 번역하는 풍토에 열 받아서 시작했단다. 세계시전집 시리즈에 포함된 시인을 고르기 위해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40여명의 전집을 구입해 읽었다. 스페인어 그리스어 폴란드어 등 사전도 샀다.
"시 문법은 일상 언어 문법과 다릅니다. 기존 문법과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최첨단에 시가 있죠. 영문학을 전공한 제가 다른 언어권 시를 번역할 수 있는 건 기존 언어의 문법에 매몰되지 않는 시 문법을 찾기 때문이에요."
영어 중역본을 함께 읽으며 각 언어권별 원문을 번역하고 있는데, 벌써 7명의 시전집은 번역을 넘겼다. 환갑을 맞는 내년까지 나머지 5권을 모두 번역해 내는 게 목표다. 국내 시집도 1만부를 넘기기 어려운 시대에 자칫 무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내 시인들이 우리말 문법을 확장해 새로운 시를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전집을 많이 읽으라고 출판사에 간담회도 열어달라고 부탁했단다. 자기 시집이 나와도 인터뷰를 시큰둥하게 여기는 김씨의 이전 모습을 떠올리면 이 시리즈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짐작된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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