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기사들 44명을 이끌고 중국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온 김성룡 9단을 며칠 전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한중 교류전 성적이 신통찮아 기분이 별로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 왔다.
"우리가 승률 44%를 거둔 데 대해 저는 오히려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애당초 우리가 이기려고 중국에 간 게 아니니까요. 요즘 중국의 젊은 기사들이 엄청 세졌다는 건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까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중국으로 바둑 공부하러 간 거죠. 반대로 이번에 우리가 그 정도로 이겼다면 아마 본전 생각 많이 났을 겁니다."
듣고 보니 나름 일리 있는 얘기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랭킹 10위 안에 들 정도의 일류급 고수가 중국엔 두 배쯤 있고, 20~30위권으로 내려가면 거의 세 배 정도라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번 교류전에서 우리가 진 건 당연한 일이고, 우리 젊은 선수들이 중국 고수들과 아무 부담 없이 일합을 겨뤄볼 기회를 가졌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최근 세계대회 통합예선에서 중국 선수들이 항상 한국의 두 배 정도 본선에 오르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현재 모든 대회가 토너먼트 방식이기 때문에 마지막 정상에 누가 서느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최상위권에서는 아직까지 한국의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지난해에도 각 기전 통합예선 단계에서는 매우 부진했지만 결국 백홍석과 이세돌이 비씨카드배와 삼성화재배서 우승했고 원성진(LG배), 박정환(응씨배), 이세돌(춘란배)이 결승까지 올라갔지 않습니까.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겁니다. 다만 앞으로가 좀 문제이긴 하죠."
이번 교류전에서 남자선수 중에선 작년에 입단한 막내 신진서(13)가 단연 두드러졌고 여자는 최정(17), 김채영(17)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출생자 중에서 1993년생 박정환 외에는 믿을 만한 선수가 별로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1998~2000년생인 이동훈(15), 신민준(14), 신진서가 꽤나 희망이 있어 보이지만 그보다 나이가 위인 나현(18), 변상일(16)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여자들은 이번에 선전했습니다. 중국과 전체적으로 대등한 승부를 보여줬어요. 최정, 김채영은 앞으로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중국도 루이나이웨이를 비롯해서 탕이, 송롱후이가 슬슬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리허, 왕천싱, 위즈잉 외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선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박지은, 최정, 문도원, 김혜림, 김채영이 출전하는 올해 황룡사쌍등배가 은근히 기대됩니다."
2월말께 다시 항저우로 2차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다. 이번에는 랭킹 30~50위권의 락스타리그 선수들을 중심으로 올 초에 입단한 새내기들도 대거 참여한다. 1차 교류전 멤버에 비해 약간 기량이 떨어지는 2진급 선수들이다. 지난 번 참가자 중에서도 10명이 또 가겠다고 신청했다. 인기 폭발이다. 신청자가 너무 몰려서 간신히 26명으로 끊었다. 상대인 중국 국가대표 2팀이 모두 40명인데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그 정도 밖에는 출전할 수 없다고 해서다.
"23일부터 3월2일까지 7박8일간 1인당 하루 세 판씩 모두 20판 공식대국을 치르고 저녁 시간에 자기들끼리 벌이는 비공식대국까지 합치면 1인당 40판정도 두게 될 겁니다. 매일 하루 종일 바둑만 두는 셈이죠."
한중 교류전은 평소 중국 바둑계와 친분이 깊은 김성룡 9단이 젊은 후배들에게 중국기사들과의 대국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2005년에 처음 시작한 개인 차원의 비공식 행사인데 이제는 바둑 좀 둔다는 젊은 기사라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필수과목처럼 돼버렸다.
특히 연초에는 공식 대국이 거의 없기 때문에 랭킹이 낮아 세계대회 출전 기회가 적은 젊은 기사들에게는 3~4월께 시작되는 한국과 중국의 바둑리그를 앞두고 각 팀 감독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실제로 이번 교류전을 치르면서 나현과 변상일의 중국리그 진출이 거의 확정됐고 5~6명 정도가 구두 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한국리그 감독들도 새 시즌 선수 선발을 앞두고 이번 교류전 성적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중 교류전을 아예 정례적인 공식행사로 격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아요. 중국에서도 원치 않을 거예요. 공식 행사가 되면 성적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선수단 구성에서부터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만 생기고 전혀 실익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각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제일 좋습니다."
김성룡은 국내는 물론 중국 바둑계 인사들과도 두루 친분이 깊은 소문난 마당발로 일찍이 "보급기사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고 TV해설과 바둑책 저술 등 보급 활동에 힘써 왔다. 그러면서도 2004년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에서 우승한 어엿한 타이틀 보유자이기도 하다. 2011년에는 한국바둑리그 포스코LED 감독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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