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기, 수도, 대중교통 같은 공공요금이다.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가격이 들쭉날쭉하거나 특히 너무 오를 경우 다수의 소비자에게 지나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가 가격을 통제한다.
공공요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격을 수요와 공급에만 맡기지 않고 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규제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상품이 책이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서점들이 등장하면서 책 가격 할인 경쟁이 거세지자 출판ㆍ서점업계가 이구동성으로 요구해 2003년 처음 도입됐다. 두 차례 개정돼 현재는 발행된 지 1년 반 미만의 책은 최대 19%(온라인서점 마일리지 서비스 경우)까지만 할인이 가능하다.
국내에 도서정가제법을 도입할 때 모델로 삼은 법 중 하나가 프랑스의 정가제법인데, 이 법을 도입한 자크 랑 문화부 장관은 1980년대 초 입법 취지를 의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책을 다른 상품과 달리 취급하는 예외적 제도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책을 일반 상품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의지이며, 시장의 논리를 다소 굽혀서라도 책이 당장 수익 논리에만 좌우될 수 없는 문화적 재산임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도서정가제법을 도입한 유럽 주요국들의 논리가 한결 같이 이럴 것이다.
책은 상품이기에 앞서 한 시대 지식의 집적이자 사유의 총화이며 일종의 공공재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상기하면서도 독자들은 왠지 개운하지 않다. 일정한 룰만 따른다면 조금 할인해 사는 게 그리 나쁜 일인가? 물류나 경상비용을 줄인 인터넷서점이 그 혜택을 도서 할인으로 독자에게 돌려주는 것도 막아야 하나?
소비자들이 이 같은 의구심을 품는 것은 책이 지식을 집적하고 전파하는 '매체'이자 '상품'이라는 이중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들이 지식을 생산ㆍ가공하는 '문화인'이면서 책을 팔아 돈을 버는 '장사꾼'이라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목소리 높여 도서정가제법을 만들어낸 것도 출판ㆍ서점인들이고, 마구잡이 할인 판매로 그 법의 취지를 배반한 것도 출판ㆍ서점인들이다. 독자들이 책 값 안 깎아준다고 언제 아우성 친 적이 있던가?
도서정가제법은 지금보다 강화하는 것이 옳다. 책값 할인 경쟁은 출판인들에게 좀더 헐값에 책을 만들도록 끊임없이 강요한다. 좋은 원고를 발굴해 멋있는 편집으로 책을 만들려면 책값을 자꾸 올리고 싶은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제살 깎아먹기식 무한 할인경쟁으로 내몰리던 서점업자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수익률 제로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되든 안 되든 독자들이 부담할 책 값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잠시 할인으로 싸게 샀다는 착각을 할 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책값 할인 경쟁이 건강한 지식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문서 등 다양한 전문서적의 출판을 갈수록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면서 50위권에 드는 싱크탱크가 하나도 없는, 경제의 외형에 비해 지식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균형 잡히지 못한 나라다.
하지만 도서정가제법은 그런 출판 활성화를 위한 작은 출발점일 뿐이다. 그것을 강화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다양하고 좋은 책이 나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갈수록 독서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책 앞으로 끌어올 수도 없다. 도서정가제 강화로 그 출발점이 마련된다면 그 다음 출판문화를 살리는 것은 온전히 출판ㆍ서점인들의 몫이다. 그들이 '장사꾼'이기보다 '문화인'의 사명에 더 충실하지 않는다면, 도서정가제에 대한 독자들의 의구심은 풀리지 않을 것이며 정가제를 둘러싼 논란은 언제라도 재연될 것이다.
김범수 문화부 차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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