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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의 자막, 첩첩의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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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의 자막, 첩첩의 장벽

입력
2013.01.2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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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한 편 다운받았다. 제목은 '고령가소년 살인사건'. 대만에서 만들어진 1991년 영화다. 뜬금없이 이 4시간짜리 옛날 영화를 보기로 한 건 웹하드 사이트에 동영상파일과 자막파일이 함께 올라와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영화가 몹시 보고 싶었을 때에는 어디서도 한글자막파일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를 돌린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난감한 답답함이 찾아왔다. 동영상파일에는 중국어자막과 영어자막이 함께 내장되어 있었고 그 위에 따로 제작된 한글자막이 떴다. 무려 세 개의 자막이 컴퓨터 모니터를 절반 가까이 덮었다. 게다가 이 한글자막, 뜻이 안 닿는 부분이 많아 처음에는 구글번역기로 돌린 엉성한 번역이려니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단조롭다'를 '건조롭다'라고 한다. '그런데'를 '건데'라고 한다. '33쪽으로 넘어가자'를 '33쪽으로 번져보자'라고 한다. 이 자막을 만든 사람이 어쩌면 '다른 한국어' 공동체의 일원, 가령 중국에 사는 조선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참이 지나서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어'라는 외국어 자막인 셈. 생소한 단어와 표현법에 기가 질려 그만 볼까 하다가 그냥 눈에 힘을 빼고 마저 보았다. 영화 속의 세계로 이어주기는커녕 나와 영화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저 중국어, 영어, 조선어의 장벽들과 마주한다는 것. 그것 역시 다운로드 시대의 기묘한 영화적 체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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