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위대한 성자,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상징되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1월 30일 뉴델리 거리에서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두세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47년 인도의 분할 독립으로 힌두교 신도와 이슬람 신도간의 대립이 격화하자 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벵갈과 뉴델리를 방문하던 중이던 그는 이날 오후 늘 참석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화해를 촉구하는 단식으로 눈에 띄게 몸이 쇠약해진 간디가 두 증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군중 사이를 빠져나갈 때 한 남자가 나타나 그의 발을 만지려고 했다. 간디가 두 손을 모아 쥐며 평화롭게 미소 짓는 순간, 엎드렸던 남자는 허리를 일으키며 권총을 뽑아 들었고 정면을 향해 세발을 발사했다. 땅 위로 쓰러지는 간디의 목에서는'라마'라는 신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간디는 이미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불과 열흘 전 기도회 자리에서도 폭탄이 폭발했고 주위에 늘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만일 내가 광신자의 총탄에 죽게 되면 웃으며 죽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1869년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난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는 인도의 문호 타고르가 칭송한 시를 따라 위대한 스승에 대한 인도 국민들의 호칭이 됐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간디는 87년 영국으로 유학해 법률을 공부했고 귀국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93년 소송 사건을 의뢰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향했고, 이 여행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기를 가져왔다. 일등칸 표를 끊어 기차에 오른 간디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역무원과 경찰관에 의해 기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 사건은 그에게 남아공에 사는 모든 유색인종들에 대한 차별임을 각인시켰다.
부당한 처우를 받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한 그는 남아공에서'사티아그라하'(진실관철투쟁)를 전개했고 세 차례의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인도인들에 대한 차별법을 폐지시키며 정신적 지도자로 성장했다.
1915년 조국으로 돌아온 간디는 수행자들의 거처인 아슈람을 만들어 무소유 공동체 정신을 실천해나갔다.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국민의 권익, 하층 계급의 인권을 위한 그의 투쟁은 계속됐고 직접 물레를 돌리며 옷감을 짜서 입는 운동도 병행했다.
47년 8월 15일, 마침내 인도는 영국령에서 독립하지만 간디가 그토록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 넘는 통합은 이뤄내지 못했다. 힌두교도의 인도와 이슬람을 믿는 파키스탄으로 분할 독립된 것이다.
종교간의 갈등은 결국 위대한 사상가의 희생을 가져왔지만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아 이어지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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