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호주 빅토리아주의 시골마을인 그레타 마을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시골마을의 장례식이었지만 수백명의 인파와 세계 각국 언론들이 모여 묘지 주변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호주의 로빈 후드라 불리는 네드 켈리. 1880년 교수형을 당한 뒤 시신조차 찾을 수 없던 그가 무려 133년 만에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묘지 옆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서방 언론들은 그의 장례식이 열리기까지 현대 과학기술을 총동원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켈리의 시신은 교수형 집행 뒤 줄곧 행방불명 상태였다. 호주의 한 감옥에 다른 사람들의 시신과 함께 매장됐다고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호주 정부는 2008년 3월 맬버른의 펜트리지 감옥 터에서 33개의 관이 우연히 발견되자 켈리의 시신이 포함돼 있을 수 있다는 켈리 후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검증을 시작했다. 검증 작업에는 CT촬영 X선 치의학 병리학 등 모든 기술이 동원됐다. 3년 5개월 만인 2011년 8월 마침내 켈리 후손의 DNA 샘플과 일치하는 유골을 찾아냈다.
133년 만에 켈리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조명받고 있다. 그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나 10대 초반부터 가족을 부양하다가 강제노역에 불만을 품고 목장주를 폭행하는 등 10대 중반까지 감옥만 세 차례 들락날락했다. 19세였던 1873년 출옥 후 동생, 친구와 갱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범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이후 3명의 경찰을 살해하고 여러 은행을 털기도 했다. 켈리는 이 과정에서 가난한 농부들의 빚 문서를 불태우고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영국 경찰이 호주에서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교도를 탄압하는 것 등을 알리며 서민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켈리는 그러나 추종자의 배신으로 경찰의 함정에 빠져 체포됐고, 1880년 2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체포 당시 쇠로 만든 투구와 갑옷을 입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이후 철가면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철가면 이미지는 이후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현대 화가 시드니 놀란의 여러 작품에 영감을 줬다.
그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호주에서는 최근 그에 대한 평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영국 BBC방송이 20일 전했다.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 그가 서러움에 울던 호주 국민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은행 강도로 모은 돈으로 서민들을 도왔다지만 살인과 방화, 강도 등의 행동까지 정당화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켈리가 처음에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시작됐다가 영웅심으로 이어지며 본의 아니게 선행을 베풀게 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호주에서는 켈리의 장례식에 앞서 정부 차원의 장례식 지원을 놓고 시민단체 간 찬반의견이 갈려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호주의 유력 일간 시드니모닝헤럴드는 21일 "1970년 영국 록그룹 롤링스톤즈의 아일랜드계 멤버인 믹 재거가 켈리 역을 맡은 영화가 제작되는 등 과거에는 영웅 이미지로만 그려지던 켈리가 최근 다른 시각으로도 평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그러나 "켈리의 처형 전 3만여명의 시민들이 구명 탄원서에 서명했던 것처럼 아직은 그를 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더 많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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