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의 도쿄대 불문과 학생이던 1957년, 소설가로 데뷔해 57년째 현역으로 활동 중인 오에 겐자부로(78)의 발표작 가운데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은 자전적 장편 (1964)이다. 한 해 전 뇌장애가 있는 장남을 얻었던 경험을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을 계기로 성, 폭력 등 인간 존재의 밑바닥을 천착하던 오에의 문학은 공생을 비롯한 대타적 주제로 뻗어갔다. '나'라는 1인칭 화자 대신 3인칭 시점을 택해 내러티브의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에 문학의 진정한 전환은 중단편집 (1969)가 아닐까 싶다. 처절한 절규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적인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 'O teach us to outgrow our madness'를 따온 것이다. 1968년부터 이듬해까지 발표한 중단편 5편(한국 기준보다 훨씬 긴 분량이다)에 짧은 분량의 서문을 묶은 이 책은 이태 전 펴낸 장편 과 더불어 향후 오에 문학이 펼쳐보일 웅장한 개성을 응축하고 있다. (오에가 창조한 캐릭터의 연속성을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수록작에 나오는 도쿄 친척집에 머물게 된 지방 경찰, 죽은 아버지와 교신한다며 녹음기를 앞에 두고 독백하는 중년 남자는 각각 장편 (1988), (2000)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수록작마다 시를 인용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서문, 단편 3편, 중편 2편으로 나뉘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단편에 오에의 자작시를, 중편엔 위스턴 오든과 블레이크의 시를 각각 끌어들인다. 블레이크, 단테, 예이츠 등 시인, 세르반테스, 디킨스, 플래너리 오코너 등 소설가의 작품을 철저하게 탐독한 뒤 그 문학적 정수를 자신의 주제의식 및 상상력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 오에의 독창적 창작법의 효시인 셈이다.
서문은 오에 소설 작법의 원리를 천명하는 선언문처럼 읽힌다. 시의 말과 소설의 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그는 자신은 "시를 단념한 인간"이지만 시는 "소설을 쓰는 인간인 내 육체=영혼에 박혀 있는… 불타는 가시"라고 규정한다. "일상 생활에서 내 육체=영혼은 그 깊은 곳에 확고히 가라앉아 있는 시의 추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면, 소설을 쓰려고 하는 내 육체=영혼은 내 소설의 말에 기대어 어떻게든 이 불타는 가시에 대항하려 한다."(14~15쪽)
오에는 시의 말은 "방사성 물질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납"처럼 실질과 기능이 분리되지 않은 채 "육체=영혼 속에 단단히 파고 들어가 버린다"고 상찬하는 반면 "소설의 말의 실질은… 거의 실질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평한다. 소설가의 자기비하라는 지레짐작은 그러나 곧장 뒤집힌다. 오에는"소설의 말에서는 기능이 바로 그 주체"라는 호언으로 소설의 독자성을 천명하고 내처 "소설의 말의 껍데기(기능)는 로켓을 만드는 데 쓰이는 특수한 합금처럼, 얇고 가볍고 질기면서도 그 내부에 풍부한 기능을 담고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단언한다. 독자의 육체=영혼을 강타할 핵탄두(시의 말)는 그것을 날려보낼 로켓(소설의 말) 없이는 무용하다는, 당시 30대 중반이던 청년 소설가의 야심만만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시=존재의 심연'을 소설의 언어로 형상화하겠다는 다부진 기획을 오에는 광기를 주제 삼아 구현한다. 광포한 애욕에 사로잡혀 외교관으로의 출세길을 스스로 걷어찬 유학파 박사, 전쟁 중 인육을 먹은 죗값으로 비대해진 몸을 제물로 바쳐 전쟁통에 희생되는 아이들을 구원하겠다고 설치는 남자, 해괴한 사기와 협잡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떠돌이 일가족 등 저마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로테스크한 인물이 등장하는 다섯 편의 수록작은 그야말로 '소설 읽는 재미'가 철철 넘친다. 따져보면 비현실적인데도 징그러우리만치 생생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캐릭터, 어떤 디테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치밀하면서도 절묘한 리듬감으로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만연체 문장, 광기를 개인의 정신병리학 차원을 넘어 핵무장한 세계와 야성을 잃은 현대사회로 확장하는 육중하고도 세련한 상징체계는 그가 치기 어린 비유로 공언한 '얇고 가볍고 질긴' '특수 합금의 로켓' 같은 언어의 실체를 금세 확인하게 한다.
책을 읽어보고픈 마음이 든다면 서점 대신 도서관을 찾아야 한다. 오에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1994년부터 총 24권을 목표로 출간됐지만 출판사의 부도로 완간이 좌절된 채 절판된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 전집'의 제8권이 이 책이다. 살구색 하드커버로 장정한 이 전집은 당시 정가를 훨씬 상회하는 가격으로 중고책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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